어느 모녀상(母女像) 정다빈(부곡동 화성아파트ㆍ예비대학생)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린 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 가는 아버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지난 주말 백수문학관에서 읽게 된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시조 ‘부자상 (父子像)’의 마지막 연이다. 간만의 가족여행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직지사에 들러 온 가족이 함께 읽은 시조였기 때문이었는지 더 마음에 애잔하게 다가왔다. 2년 전, 우리 집이 이사를 하고 엄마와 함께 책을 정리하다 오래되어 빛이 바랜 시집 한 권을 찾아낸 적이 있다. 책장을 열자 검정 볼펜으로 적혀진 ‘82년 12월 박경미’ 가 보였고 몇몇 시 구절에는 줄이 그어져있었다. 26년 전 아직 열아홉이었던 엄마의 흔적을 본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는데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26년 전의 엄마는 지금 꼭 내 나이의 열아홉에서 스무 살이 되는, 대학 입시에 쫓기던 날들에 벗어나서 이제 조금은 책을 읽고 시집을 살 여유를 가진 여학생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일보다는 가족을 위한 일들에 시간을 할애하는 헌신적인 엄마의 모습만을 보며 자란 나에게 82년의 열아홉 여자아이 엄마의 모습은 어쩐지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 역시 분명 열아홉이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나도 언젠가는 마흔 다섯의 여성이 되는 날이 있겠지. 주말의 가족여행에서는 아빠의 고향인 상주를 돌아보기도 했다. 지금은 원룸과 새로운 상가가 들어선 곳에 아빠가 예전에 살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엔 만두집이 있었고 이 맞은 편엔 극장이었고 하며 설명하시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아빠 역시 나보다도 더 어린 소년이었던 때가 있었고 지금 나처럼 갓 스무 살이 된 때도 있었을 테고 하며 지금은 사라진 풍경 속 그 자리에 서있었을 오래전 아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이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 무렵 읽게 된 시조라 백수 선생의 ‘부자상’이 내 마음에 꼭 들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스무 살의 내가 마흔 여섯이 되는 날에는 나 역시 시조의 구절처럼 엄마에게서 팔순의 외할머니 모습을 보고, 거울 속의 내 모습에서는 지금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되겠지. 한 달 전쯤, 내가 대학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눈물을 흘리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해 동안, 실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나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다지 다정하지 못한 고3 딸을 언제나 먼저 챙기시던 엄마는 기뻐서 우시기도 했고 다른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해 한 해 먼저 집을 떠난 동생의 뒤를 이어 나 역시 집을 떠나게 된다는 아쉬움에도 눈물을 흘리셨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기쁨에 ‘드디어 끝이구나’ 하고 들떠있던 시간들이 지나자 나 역시도 부모님을 떠나고 아마도 이번 겨울이 부모님과 함께 사는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매일아침 세수를 하고 함께 스킨과 로션을 바르는 거울 속의 엄마와 나의 얼굴은 많이 닮아있다. 이젠 감기도 쉽게 들고 치아도 안 좋고 머리 염색도 자주 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자꾸 마음이 아프다. 흘러가는 세월을 내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흔 여섯 엄마의 삶에도 팔순의 엄마의 삶에도 내가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아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로션을 바르는 엄마와 나의 아침은 또 하나의 모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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