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마을이야기(마지막회)
미곡동(다수동,백옥동)편
1998년 부곡동과 함께 대곡동으로 통합된 미곡동은 1983년 미곡동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1914년부터 금릉면 백옥동과 다수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미곡면으로 속하여 옥산, 본리, 노증리, 구신기, 이로리 등 5개마을로 나뉘어 불렸다.
미곡동 관할에는 다수(多壽), 이로(二老), 노증(老增) 등 노인과 장수를 의미하는 지명이 다수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미곡(米谷)이라는 지명은 88세의 나이를 뜻하는 미수(米壽)에서 따왔다고도 하고 새실마을의 성산전씨 재실인 미곡정사(薇谷精舍)의 미곡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신기, 바깥새실 등으로도 불리는 새실은 새터 즉 한자로 신기(新基)로 적으므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본디의 마을로부터 새로 분가해 형성된 마을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새실마을은 조선 성종 때 생원 전만령(全萬齡)이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령에서 미곡동 새실로 이거한 후부터 대대로 성산전씨 백파(伯派)집성촌을 형성해 왔다.
전만령은 1506년 조정에서 지평 벼슬을 제수했으나 시 한 수를 지어 사양한 일화로 유명한 분이다.
世事琴三尺
生涯酒一杯
西亭江上月
東閣雪中梅
세상만사는 삼척 가야 금에 부치고
평생의 일은 한잔 술잔에 맡겼네
서쪽의 정자는 강상의 아래요
동쪽의 누각은 눈속에 핀 매화꽃 일세
평생을 미곡동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중종임금이 여러차례 공의 문장을 칭찬했고 공의 사후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묘갈문을 썼다
영남제일문을 지나 좌측으로 덕대산 자락인 안산아래에 자리한 이로리는 임진왜란때 다른 성씨를 가진 두 노인이 피난을 와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두이(二)자에 늙을로(老)자를 써서 이로리(二老里)라 했다고 전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이로(伊老)로 써고 있다.
백옥동은 내촌(안새실), 노증리, 옥산동이 속했는데 내촌으로부터 흘러내린 하천(지금은 복개천)으로부터 시내방향의 마을들을 일컫는다.
새실로 통칭되는 일대 마을 중 가장 오래된 마을이며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하여 본리(本里) 또는 내촌(內村)으로 불리는 안새실마을은 성주골 입구에 자리잡은 큰 마을로 마을중앙의 고목 회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마을의 형성내력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옛날 예씨(芮氏)들이 이 마을에 살았는데 나라에 큰 죄를 지어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못을 팠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때의 못이 마을인근 철로변에 있는 예못(芮池)으로 지금은 음이 변해 애인지라고도 불린다.
▲ 내촌마을 예못전경
노정리(老增里)는 현 백옥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마을로 옛날 주민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염원이 지명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설에는 노(魯)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마을에 처음 들어 왔기 때문에 노증(魯曾)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노증리의 남쪽으로는 풍수지리상으로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산세를 이루고 있어 이름 붙여진 옥산(玉山)아래에 옥산동으로 불린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옛 이야기로만 전할 따름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김천마을이야기 연재를 마치면서
2005년 4월 7일 아포 대신리 함골마을을 시작으로 3년 8개월여에 걸친 김천지역 마을답사의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김천마을이야기에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여러분과 흔쾌히 마을안내와 조언을 주신 마을주민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답사와 연재의 기회를 통해 김천의 뿌리와 정체성을 현장에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저 자신, 진정한 김천인으로 동화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거친 후 새로운 김천역사이야기로 독자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