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이면 이름이 불리어지는 고 이종호 소령
연천지구전투에서 전사하고 두 아들 월남전 참전
해마다 6월6일 현충일이면 어김없이 불리어지는 이름이 있다. 자산공원 현충탑 앞에서 거행되는 현충일 행사에 참석해본 시민이면 기억할 수 있는 이름 ‘고 이종호 소령’.
충혼탑에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는 1천787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대표해서 ‘고 이종호 소령 외 1천786위’에 대해 묵념을 하지만 그분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
“지난해 저와 가깝게 지내는 김정기 전 도의원을 통해 현충일 행사 때마다 아버지의 존함이 호명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직장생활 하느라 고향을 떠나 살다보니 부끄럽게도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죄송한 마음 가눌 길 없어 아버지에 대한 흔적을 찾기로 다짐하고 육군본부 민원실을 방문해 아버지의 훈장과 훈장증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 친구인 김정기 전 도의원이 들려준 말 때문이지요. 아버지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지만 남아 있는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농소면 월곡2리 용시마을 이장수(63세)씨의 말이다.
혁신도시와 KTX역사 건설현장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이곳 용시마을은 이종호 소령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이 소령의 아내 나훈단씨가 일찍이 혼자돼 두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운 곳이며 두 아들 중 큰 아들 이장수씨가 주말이면 부인 박순자씨와 함께 어김없이 찾아와 머무는 곳이지만 반겨주는 이가 별로 없었다.
산림조합중앙회 상무이사로 5년 전 정년퇴임하고 현재 대전에 소재하고 있는 산림조합중앙회 산림자원조사본부 학술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장수씨는 육군본부를 비롯한 국방부, 행정안전부 등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온갖 노력을 다한 끝에 돌려받은 거라며 2개의 무공훈장과 액자에 넣은 훈장증서를 보여주었다.
6.25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12월30일자 금성화랑무공훈장(제1보병사단 육군소위 이종호)과 1952년 6월5일자 무성화랑무공훈장(제1보병사단 육군대위 이종호)이 그것이었다. 물론 당시 받은 것이 아니다. 국방부에서는 “60년대 훈장 찾아주기 때 누군가가 찾아간 것으로 돼있다”며 2009년 2월25일자로 재발급해주고 훈장도 새로 제작해주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현재 육군인 조선경비대에 하사관 후보생으로 자원입대해 1947년 3월6일 교육 수료 후 임관하고 참전해 무성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불과 20여일 뒤인 1952년 6월24일 경기도 연천지구전투에서 전사하신 것으로 뒤늦게 알았어요. 당시 대대장까지 전사했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고 국립묘지에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비(碑) 하나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름뿐 아니라 유해도 꼭 찾아 현충원에 어머니의 위패와 함께 고이 모시고 싶습니다.”
아버지 이종호 소령의 군 복무 흔적인 육군제1훈련학교, 육군보병학교, 조선경비대 등의 수료증을 보여주며 이장수씨가 한 말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국가에서 연천지구전투에서 전사자들에 대한 유해를 발굴하고 있고 이장수씨의 DNA검사도 해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유해를 찾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도 모른채 6년 전인 2003년 이곳 용시마을에서 눈을 감은 어머니 나훈단씨. 자유당금릉군당(위원장 김철안), 보화상 효부상 등을 받은 나훈단씨의 또 하나 자랑은 두 아들이 모두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것.
이장수씨는 육군으로 월남 십자성부대에, 동생 이형우씨는 해병으로 청룡부대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종호 소령 가족은 2대 3부자가 참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아름다운 가족이다.
고 이종호 소령 아들 이장수씨와 며느리 박순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