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생각하며-고향 단상 노경애(수필가·대신초등학교 교사) 모처럼 고향을 찾아갔더니 어릴 때 추억이 깃던 뒷동산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포클레인이 산을 깎고 덤프트럭이 흙을 실어내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뒷동산은 간 곳이 없고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그 황량한 모습이 오래도록 잊어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 언덕을 넘어서 학교를 다녔다. 엄마가 장날 사다주신 꽃고무신을 신고 친구와 함께 뒷동산을 오르면 상수리나무, 밤나무, 소나무가 빼곡히 우거진 숲이 있고 길옆에는 녹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 같은 잔디 위에 한 쌍의 묘지가 있었다. 뒷동산으로 가는 길이 지름길이라 친구랑 늘 함께 그곳을 넘나들었는데 날씨가 흐린다거나 바람이 몹시 불 때는 숲에서 나뭇잎 떠는 스산한 소리에 금세라도 산짐승이 나타날 것만 같아 무서웠다. 그런데 매일 지나다니다 보니 그 무서움도 차츰 사라지고 뒷동산은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단짝인 친구와 토끼풀이 지천으로 깔려있는 묘지 앞에 퍼질고 앉아 소꿉놀이를 했다. 평평한 돌을 갖다놓고 책가방에 미리 챙겨온 장난감을 끄집어내어 놀았는데 장난감이래야 병뚜껑과 어머니가 몸빼바지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에 목화솜 넣어 만든 인형이 전부였다. 친구는 아빠, 나는 엄마, 그리고 인형은 아기가 되었다. 아내가 된 나는 다소곳이 앉아 병뚜껑에다 침을 뱉어 흙을 짓이겨 밥을 짓고 무덕무덕 핀 망초꽃은 달걀 반찬이 되었다. 친구는 양반다리를 하고, 나뭇가지로 젓가락을 만들어 쩝쩝거리며 밥 먹는 시늉을 하면 나는 인형의 가슴을 토닥이며 아기를 재웠다. 비록 옷은 땟국에 절어있지만 토끼풀꽃으로 꽃목걸이를 하고 꽃반지도 만들어 손가락에 끼우면 마치 마음은 공주와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검정치마에 흙먼지와 검불이 뒤범벅되도록 놀다보면 멀리서 쑥국새소리가 들려오고 산 그림자가 내렸다.
그때의 그 계집아이는 군데군데 흰 터럭이 내린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다. 내 모습이 변한 것처럼 고향마을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산허리를 잘라 새 길이 뚫리고 상가가 앞 다투어 들어서니 마을 인심도 예전 같지가 않다. 멀리서 바라 볼 때는 한없이 그립던 고향이 막상 다가가면 낯선 풍경에 달뜬 마음이 잦아든다. 몇 달 전 내 아버지가 먼 길 떠나셨듯이 정답던 이웃들도 하나 둘 풍경 속에서 사라진다. 고향을 오 갈 때마다 골목에 낯선 사람들이 다니는 모습을 보면 덧없는 세월에 무거운 발걸음을 돌린다. 하지만 낯익은 풍경들이 사라진다 해도 삶이 힘든 다거나 문뜩 외로움이 밀려 올 때면 나는 또다시 고향을 찾는다. 길가다가 저녁노을을 향해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어디선가 풋고추 썰어 넣은 된장국 끓이는 냄새, 뒷동산에 토끼 풀꽃이 방석을 깔아 놓은 계절이 오면 고향집 부모님이 생각나고 친구가 그리워져 눈시울이 붉어진다. 친구와 질펀하게 놀던 고향뒷동산을 이젠 볼 수 가 없다. 그 자리에 머지않아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고향은 또 다른 모습이 되어 나를 바라 볼 것이다.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뒷동산은 세월 속에 묻혔지만 황금으로도 살 수없는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내 가슴속에 각인 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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