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론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명’을 생각하며
이 청
(서양화가)
앞서가는 차량이 좌우 깜박이를 켰다 껐다 한다. 혼란을 느낀 운전자들은 “도대체 어느 쪽으로 가자는 것이냐”고 묻는다. 대답을 들으면 더 헷갈린다. “왜 한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사고방식을 버려라 양쪽으로 다 갈 수 있다” 이 나라 정치 지도자들과 그들의 방향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국민들 사이에서 요즘 벌어지는 이 진풍경을 보면 가관이다.
너와 나는 같이 손잡고 세상의 우여곡절을 같이 하는 상생과 참여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나 아닌 너는 적일 것이 분명하며 그래서 기어코 굴복시켜야 한다는 음험한 싸움의 등식이 어느 듯 우리 사회의 속살에 깊숙하게 배어 들지 않았나 싶다.
지금 우리에겐 옛날이나 지금이나 짓누르고 있는 고단한 삶의 중력에서 조금도 비켜나지 못했다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덜기는 커녕 폭력에 가까운 변덕과 몰락조차 아랑곳 하지 않고 번지는 불화와 갈등으로 시간을 보내 버렸다는 회한이 가슴을 파고든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분법적 사고가 지난시간 우리 모두를 덥석 물어 버렸고 그 속에서 은연중 휩쓸려 우리의 고유한 삶의 무늬조차 놓쳐버렸다는 상실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지금 이 시각 우리들이 겪고 있는 대립과 분열은 애석하게도 쓰러져도 웃으며 일어서는 너그러움으로 치유되지 못하고 오히려 편협함과 천박함으로 도배질 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불화는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무기력으로 일관되게 만들었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가치관의 양극화를 불러왔다.
손사래를 쳐도 계속해서 쏟아지는 막말의 소나기는 우리들의 자긍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오면서 제 발등 제가 찍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폄훼하게 만들었다.
존경의 대상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대응이 상식화 되어버려 우리의 살갑던 언어 정서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 이런 사회적 혼란과 변덕스러움은 우리 모두의 신중하고 질서 정연한 계획과 그리고 담대하고 확연했던 목표에서 궤도를 이탈시켜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나 자신이 중심을 지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지침을 삼을만한 제안을 모아 ‘역설의 진리’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자.”
우리에겐 역경 속에서도 벌떡 일어날 수 있는 패기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저기에서 별 희한한 어법으로 우리들의 속을 뒤집는다 할지라도 위안과 희망을 솎아 낼 수 있는 혜안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들 가슴속에 달아 붙은 수치와 분노와 불화를 말끔히 씻어내고 선하게 생긴 큰 눈에 무한한 편안함을 싣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너그러움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 빈자리에 위안과 화합의 길벗을 불러 앉혀야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람이 절망하여 엎어질 때의 쓰디쓴 눈물의 맛을, 몇 번을 날아올라도 매번 시도는 헛되고 진흙에 빠진 수레와도 같이 겨우 손잡이만이 빠져나온 참담한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려운 확률의 과녁을 맞추는 능숙한 사수보다는 천 번 만 번 실패를 감내하는 분발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삶이 윤택해 지는 것은 그냥 두어도 자라나는 손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이 말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스스로 썼다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버나드쇼의 ‘묘비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