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그네 설움’ 함께 떠돌던
‘무너진 사랑탑’, 김천에 다시 솟다
민경탁
(가요연구가)
갈 길이 천리라고 기차도 울고 갈 땐
낯설은 정거장엔 푸른등 깜박이네
말만 듣고 가는 서울 이 몸이야 간다마는
김천아 잘 있거라 추풍령아 다시보자
내 고향 경상도를 꿈길인들 잊으랴
‘김천’이란 지명이 곡 중에 등장하는 가요이다. 1960년대 중반, 가수 남백송의 ‘경상도야 잘 있거라’란 가요의 3절 가사이다. 이 노래는 나중에 ‘경상도 내 고향’으로 개명했는데, 이탈 애수가 우리 대중가요의 중심 정서가 되던 그 시절, 김천이나 경부선ㆍ경상도 역시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장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노래 중 하나이다.
가요는 그 시대 서민들의 가장 진솔한 정서의 표현이다. 프랑스의 샹송, 미국의 컨트리 뮤직, 일본의 류코카, 터키의 아라베스크 그리고 한국의 트로트가 그러하다.
한국의 트로트는 그 명칭에서 자기 비하적 진통을 겪은 끝에 지금 한국의 전통가요가 되고 있다. 민족주의를 앞세운 일부 지식인들의 일방적인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트로트가 우리 가요의 중추적 실세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뭐라 해도 한국인의 삶의 목소리와 정체성과 한(恨), 흥을 대변해 주는 가요가 되어 있잖은가.
한국의 대중가요는 1920년대 중ㆍ후반에 탄생하였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1926), 이정숙의 ‘낙화유수’(일명 강남달, 1929)를 그 출발점으로 한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으로 시작하는 ‘낙화유수’는 최초의 한국 창작가요였다.
곧이어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황성옛터’로 개명함. 1932),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이 나오면서 우리 대중가요는 태동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요사의 정설이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하여 수난과 퇴행을 겪으며 발달해온 우리 대중가요를 역사적으로 정립하기에 관심을 갖는 이가 거의 없었다.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100년이 채 안 되는 가요사(歌謠史) 관련 도서가 이제야 발간되고 있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대중가요를 우리는 정책적으로 접근해본 경력이 거의 없으며, 이데올로기나 정치 논리로 가위질을 해 본 경력은 빈번하였다.
한국가요사에 1970년대에 포크와 록, 1980년대 초반에 발라드가 등장하면서 우리 가요의 성격이 한 획을 긋게 되는데, 1945년 이전에 데뷔한 가요 음악인들을 가요작가 1세대로 구분한다.
그 가요작가 1세대의 작사가 고려성(본명 조경환, 1910~1956)과 작곡가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은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태생의 형제 가요작가였다. 가요 ‘나그네 설움’(백년설)은 고려성 선생의, ‘무너진 사랑탑’(남인수)은 나화랑 선생의 대표작이다. 두 분의 가요사적 업적이 그동안 배일에 가려 있었는데, 지난해 말 김천 직지문화공원 폭포수 옆 언덕에 노래비를 세웠다. 고려성-나화랑 형제 노래비가 두 분의 가요정신을 영원히 기리면서 지역 문화예술 및 관광의 한 콘텐츠가 되길 기대한다.
한 쪽에서 랩과 힙합 리듬이 출렁거려도 우리의 전통가요는 어떤 장르의 가요보다 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향유되는 중추적 음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