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생각하며 내 보따리 강기석 (지동초등학교 교장) 눈이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많이 내릴 줄은 몰랐다. 귀가를 서둘렀지만 다부재를 오르니 길은 이미 빙판으로 변해있었다. 앞이 캄캄했다.
운전경력은 20년이 다되어가지만 내 실력은 언제나 초보 수준이었다. 도심의 좁은 구역에서 주차하는 것도 어렵고 야간에 차선을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웬만하면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몸은 비록 불편하더라도 마음은 편한 그만한 실력이었다.
가야만 했다. 차를 몰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택시를 부를 수도 없고 버스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눈이 많이 오는 봉화에서 근무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미끄러운 고갯길을 내려갈 때는 브레이크를 밟지 말고 기어를 1단으로 하고 사이드브레이크를 반쯤 당기고 내려가면 된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냈다.
차는 사정없이 미끄러졌다. 뒷바퀴가 앞바퀴를 따라잡으려고 했다. 뒤쪽이 오른쪽으로 쏠렸다가 왼쪽으로 쏠렸다가를 반복했다. 오른쪽 가드레일과 충돌하려다가 방향을 조금 바꾸면 왼쪽 가드레일과 충돌하려고 했다. 뒤따라오는 차들이 층돌 위협을 느끼고 경적을 울려댔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위기에 떠오른다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직장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직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긴장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살아야한다는 절박감으로 눈에 빛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차들은 여전히 내 차를 비켜서 잘도 가고 있었다.
결국 차는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섰다. 가드레일이 없는 곳에서 위험을 느끼고 속도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차가 빙그르르 돌더니 중앙분리대를 바라보면서 도로 1, 2차선을 수직으로 가로 막아버렸다. 앞은 중앙분리대가 막혀있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고, 뒤는 낭떠러지였다. 잘못 움직이면 뒤로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 같았다. 30여분의 사투에서 패배한 나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대로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눈은 사정없이 내렸다. 눈송이가 물 먹은 목화송이처럼 무거워 보였다.
뒤따라오던 차는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길게 늘어서서 경적을 울려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데 미끄러지기 바로 전에 내 차를 추월하여 저 만큼 가던 빨간 색깔의 트럭이 멈추어서더니 작업복차림의 장정 서너 명이 내 차로 다가 왔다. 다가오는 모습이 너무 적극적이어서 그들이 긴급 도로 안전구조요원일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차를 밀어서 2차선에 안전하게 되돌려 놓았다. 차가 횡보를 한 것은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겨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바퀴가 구르는 만큼 뒷바퀴도 구르면 정상적으로 주행하게 되는데, 앞바퀴는 구르는데 뒷바퀴는 구르지 못하고 미끄러져서 앞바퀴보다 먼저 가려고 하니 차가 지그재그로 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1단에 놓고 천천히 주행하면 된다고 했다. 그들의 작업복 어디에도 구조대라는 표시는 없었다. 낯선 회사 로고가 보였다. 그들은 딱한 처치에 놓인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극심한 긴장 속에 몸과 마음이 굳어버린 나는 운전할 용기가 없었다. 차를 타면 곧장 미끄러져서 큰일을 당할 것 같이 불안했다. ‘도저히 운전 할 수 없습니다. 차를 몰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주십시오.’ 나는 살려준 사람에게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대신 운전해 줄 수 있지만 사고 나면 책임질 수 없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지만 참 야속했다. 도움을 거절당한 것이 속상했다. 이제까지 도와준 고마운 마음은 벌써 잊어버리고 더 해주지 않는 것만 원망했다. 섭섭한 마음이 앞서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들을 보냈다. 토라진 마음은 그들이 어느 회사 사람들인지 연락처가 어디인지도 챙겨두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빙판길에 운전하느라 긴장했던 탓이 아니라 받은 도움에 감사하기 보다는 더 많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한 좁은 소견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눈 때문이라고 자위해보기도 했지만 폭설을 탓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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