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말(馬)에게 말(言)을 묻다 배영희 (교육학 박사·효동어린이집 원장) 며칠째 봄비가 계속 온다. 아마, 부드러운 저 흙을 비집고 연초록 새싹들이 쏘옥쏘옥 얼굴을 내밀겠지. 봄! 언제 추웠었느냐는 듯이 개나리는 황금빛으로 피고 아이들은 새 학년을 맞이하여 재잘재잘 학교 길을 오간다. 첫 발령을 받거나 처음 입사한 사회초년생들도 푸르디푸른 꿈을 안고 첫 출근을 하고 있을 테고. 아! 3월은 왠지 설레고 제비들이 처마 끝에 앉아 짹짹거리듯 참 기분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구미에 있는 승마장엘 다녀오며 한참동안 말(馬)에게 말(言)을 묻고 싶었다. “너는 어찌하여 저 넓고 푸른 광야를 달리지 못하고 여기 이렇게 매어 있느냐?”라고. 말은 800~1천kg이나 되는 큰 몸집에 키도 보통사람들 두 배는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쩌다가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건전지를 넣은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는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지금이라도 당장 넘어 갈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란 대나무로 50cm도 안 되는 울타리를 쳐 놓았건만 그 안에 갇혀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길들여진다는 것, 사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르겠다. 승마장에 있는 말들을 보며 마치 그 모습이 우리네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고 더 화려하게 살라고, 더 많이 가지는 게 잘 사는 거라고,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큰소리친다고 계속해서 등을 떠밀며 우리를 유혹한다. 마치 경마장에 번호판을 달고 뛰는 저 말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데 길들여진 우리는 무조건 온 힘을 다해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니 항상 긴장하고, 늘 불안하고, 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 같다. 아마 저 말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더 화려하고, 더 많이 가지고, 더 큰 사람만이 꼭 성공한 삶은 아닐 것이다.
말이 초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어 먹고 야생으로 살 때 훨씬 더 평화로워 보이는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색깔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자. 다만 자기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분명히 하여 이 봄엔 박차를 가했으면 좋겠다. ‘박차’란 말(馬)의 옆구리를 신발 뒤축에 있는 뾰족한 쇠로 탁하고 차는 것을 말하는데 1월 1일 처음 먹은 마음 흔들리지 말고 나만의 향기를 내며 묵묵히 스스로에게 박차를 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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