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아포읍 예동 서당마을<舊, 개령(開寧) 보신리(甫薪里)>에 전의이씨(全義李氏)로 고려말의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분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교유하였으며, 벼슬이 정순대부판사재시사(正順大夫判司宰寺事)를 역임한 이사경(李思敬)선생이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개경에서 낙향하여 서재를 짓고 은둔 하든 곳에 이색(李穡)이 '송월당(送月堂)'이라고 지은 기문(記文)을 아포읍의 향토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한주 이진상 기념 사업회 이사 이택용씨가 기고하고 있다.
송월당기(送月堂記)
李少尹來語予曰。家君棄官。老于開寧。于居之西。置一室端居。心西方。口誦其世界之主之名。久而易服。如眞浮屠氏焉。然其飮酒愛客猶前日也。而先生末由至其中。家君思先生則不少置。如得先生一言。縣之堂之壁。是家君日對先生面。而少慰其縣縣之情矣。願名之。又衍其義焉。予曰。公。吾所從游者也。其輕世肆志。雖古高士。無以過之。蓋衣冠之胄而宦不甚達。勢有所必至焉耳。訊其面勢。則平野大川。金鼇之山在其南。直指之山在其西。東北衆山。低揖簷外。鑑池堂前。種芙蕖楊析。以寓所慕之幻境。所托之隱居。幻境卽所謂西方。隱居則晉處士也。臨流望月情興悠然。雖吾儒何以及李氏父子間哉。雖其忘在於棄世遠慕西方之人。而扶吾之綱常。以興慈孝之風。以善一鄕之俗。蓋可知也。送月堂不可無記矣。予病久矣。乞骸骨將老咸昌而未遂也。如天之福。得償所願。匹馬往來。百里山川。一樽風月。當敍舊日從游之樂。大作送月堂詩一篇。爲公歌之。停杯一問纖阿。其少弭節乎。少尹名鞅。是予姻親云。是爲記。庚申正月初吉。記。
이소윤<李少尹, 이앙(李鞅)을 말함>이 와서 내게 말하기를, 가군<家君, 아버지 이사경(李思敬)을 말함>이 벼슬을 버리고 개령(開寧, 현 김천시)에서 노경(老境)을 보내며, 살고 있는 집의 서쪽에 한 채의 집을 두고 평일에 서방(西方, 불교)에 마음을 두어, 입으로 그 세계의 주(主) 이름을 부르면서 오래도록 기뻐하고 섬기기를 참된 불교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빈객을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전일과 같습니다. 선생이 그곳에 올 길이 없으나 가군(家君)이 선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잠시도 그만둘 때가 없습니다. 만약 선생의 한 말씀을 얻어 정침(正寢) 벽에 걸게 되면 이는 가군(家君)이 날마다 선생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아서 다소나마 그 잊지 못하는 정을 위로할 것이니, 원하건대 이를 이름 짓고 또 그 뜻을 부연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공(公)은 나와 함께 놀던 분이다. 그 세상을 경시하고 뜻을 숭상함은 비록 옛날의 고사(高士)라 할지라도 이에 지나지 못할 것이니, 아마도 대대로 벼슬하던 집 후손으로서 벼슬이 현달하지 못한 것은 사세의 필연한 바 있다 할 것이다. 하고, 그 형세와 전망을 물으니 넓은 들과 큰 냇물이 있으며, 금오산<金鼇山, 금오산(金烏山)을 말함>은 그 남쪽에 있고, 직지산<直指山, 황악산(黃岳山)을 말함>은 그 서쪽에 있으며, 동북쪽은 여러 산이 나지막하게 처마 밖에 읍(揖)하고 있는데, 집 앞에 못을 파고 연꽃과 버드나무를 심어, 그의 사모하는 바의 공허한 경지와 의탁하는 바의 은거(隱居)한 정취에 붙인다 하니, 공허의 경지란 곧 이른바 서방이요, 은거는 진(晉)의 처사<處士, 도연명(陶淵明)을 말함>를 말함이다. 흐르는 물에 임하여 달을 바라보면 심정과 흥취가 유연할 것이니, 비록 우리 유가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찌 이씨의 부자 사이에 미치겠는가. 비록 그 뜻이 세상을 버리고 멀리 서방사람을 사모하는 데 있으나, 우리의 대도(大道)를 붙들어 세워서 자애하고 효도하는 기풍을 일으키고, 한 시골의 풍속을 선량하게 할 것을 가히 알 것이니, 송월당에 기(記)가 없을 수 없다.
병든 지 오래이므로 휴퇴(休退)를 빌어 장차 함창(咸昌, 상주)에서 늙고자 하나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하늘의 복으로 원하는 바를 얻는다면 필마로 왕래하며 백 리의 산천과 한 통 술의 풍월로 마땅히 옛날에 서로 좇아 놀던 즐거움을 펴볼 것이요, 크게 송월당(送月堂) 시(詩) 한 편을 지어 공을 위하여 노래할 것이다. 술잔을 멈추고 한번 묻노니 달을 운행하는 신은 잠깐 그 세월을 천천히 가게 해주겠는가. 소윤의 이름은 앙(鞅)이니, 곧 나의 인친(姻親, 사돈)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