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족상잔의 비극
5월 20일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도발이라는 정부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이로써 북한은 6.25의 비극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뇌리에 다시금 각인시켜 준 셈이다.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올해.
전후세대에게 6.25전쟁은 낯설기만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발발한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남한과 북한이라는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를 만들었다.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관 벽면에는 6·25전쟁에서 희생된 미군을 기리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지금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참전용사들의 희생의 대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작 전쟁당사자인 우리나라의 경우는 참전용사나 유가족들에게 그들의 희생에 합당한 보상이나 대우를 해주고 있는가? 대부분의 유공자들은 적은 연금과 수당에 의존해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으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6.25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그들의 희생정신을 다시 상기하기 위해 이 땅의 평화를 지켜낸 노병과 유족(유자녀)들을 만나보았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
어린 자신을 버리고 떠난 젊은 어머니...
황수동 회장(사진)은 6.25가 발발한 1950년 금릉군 아포읍 의1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올해가 6.25 전쟁 60주년이므로 황회장의 나이도 어느덧 60이다.
그해 스무 살인 모친 오월임씨가 뱃속에 황회장을 가졌을 때 부친 황의수씨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영원히 아내와 자식에게 되돌아오지 못했다.
부친의 나이 스물둘. 청춘이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유골도 찾지 못하고 전사통지서만 한 장 받았다고 한다.
황회장이 4살이 되던 무렵 모친은 개가를 했고 어린 황회장은 조부모의 손에 맡겨졌다.
그가 초등학생일 무렵 조부가 돌아가시고 남편, 아들, 며느리 모두 잃은 조모는 어린손자를 데리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다행히 학교에서는 원호대상자로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공납금을 면제받았다.
조부모가 아닌 다른 친척에게 맡겨진 유공자들은 학교도 보내지 않고 일꾼으로 키워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황회장은 커서 객지로 떠돌다 73년도에 김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스물여덟에 모친과 다시 재회한다.
모친은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은 상태였고 개가한 곳에서 손도 없었기에 그가 모친을 모셔오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 어린자신을 버리고 떠난 젊은 어머니...
이야기하는 중간 중간 황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은 그 모친도 돌아가시고 가묘로 만든 아버지 산소 옆에 모셨다.
회원 수 170명인 유족(유자녀)회 회장의 이야기다.
전쟁이 남긴 한 집안의 비극.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