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족상잔의 비극
5월 20일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도발이라는 정부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이로써 북한은 6.25의 비극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뇌리에 다시금 각인시켜 준 셈이다.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올해.
전후세대에게 6.25전쟁은 낯설기만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조선인민군(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발발한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남한과 북한이라는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를 만들었다.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관 벽면에는 6·25전쟁에서 희생된 미군을 기리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지금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참전용사들의 희생의 대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작 전쟁당사자인 우리나라의 경우는 참전용사나 유가족들에게 그들의 희생에 합당한 보상이나 대우를 해주고 있는가? 대부분의 유공자들은 적은 연금과 수당에 의존해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으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6.25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그들의 희생정신을 다시 상기하기 위해 이 땅의 평화를 지켜낸 노병과 유족(유자녀)들을 만나보았다.
스물하나에 ‘미망인’이란 이름으로
60년을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만 살아왔다
권영애(81세)회장(사진)은 열여덟에 결혼했다. 남편정수영 씨는 두 살 많은 스무살.
둘째를 배고 있을 때 6.25전쟁이 났다.
온가족이 조모를 모시고 골짜기로 피난을 잠시 갔다 돌아 온 게 전부였다.
그러다 하나 둘 씩 마을청년들이 징집되기 시작했다. 음력으로 3, 5, 7, 9월 두달에 한번씩.
3년 후 남편 정 씨도 소집명령을 받게 됐다.
그 전날 동네사람들은 왜 그리 인사하러들 오는지 술상을 차리느라 정작 남편과는 인사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셋째 딸은 유복녀로 태어났다.
석양이 그물그물 넘어가던 해질 무렵.
집안에는 다들 일하러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을 업고 소 마구간 앞에 서 있을 때였다.
이웃의 아저씨가 노란봉투를 한 장 건네줬다.
전사통지서.
머리에서 아래로 피가 쏴하니 내려갔다.
자식 전쟁터로 내보내고 매일 울고 지내시는 시어머니께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할지.
하늘이 노래졌다고 권회장은 그 당시를 표현했다.
남편은 3대독자였다. 그래서 삼촌도 사촌도 없다.
시어머니는 그길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집에 그나마 전답이 좀 있어 어린 세 자녀 데리고 먹고 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권 회장.
정말 힘든 점이 왜 없었을까마는 그 당시는 모두 너무 어렵게 살았기에 먹고사는 걱정이 아닌 남편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이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스물하나에 미망인이 되어 60년을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만 살아왔다.
권영애 회장과 같은 아니 경제적으로는 더욱 어려움이 컸을 미망인들이 김천에만 290명이 있다. 이제 노환으로 해마다 그 수가 줄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