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한여름의 열기가 계속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풀벌레 울음이 드높아가고 있다. 고향에 들렀다가 한낮에 입을 연 귀뚜라미의 노래 소리에 나도 모르게 스적스적 문밖을 나섰다. 가을은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들 눈앞에 황금벌판을 펄쳐놓고 알곡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려준다. 이렇게 골짜기마다 들녘마다 어김없이 제몫을 다해 생의 결실의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 거저 황홀하기만 하다. 청명한 하늘 아래 탐스럽게 익어가는 붉은 사과는 한낮의 따가운 열기로 속살을 더욱 단단하게 익혀가고 땅콩과 고구마는 땅 속에서 이제 곳간으로 이사할 채비를 서두르며 풍성한 계절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부모님 산소를 모신 앞산의 밤나무 옆을 지나가니 ‘툭’하며 알밤이 추락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파격음을 던진다. 하나의 구김살도 없이 대견스럽게 계절의 광채를 던져주는 튼실한 모습에 그저 고마움을 표할 뿐이다. 알뜰살뜰 보살핌도 없었는데 스스로 그렇게 자라준 밤알들이다. 갑자기 ‘조복거인(造福擧人)’(자기 복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간다)는 말이 떠오른다. 올 여름은 예년에 볼 수 없을 만큼 무덥고 국지성 소나기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채소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그냥 녹아내리기도 했다. 쉽게 가을이 올 것 같지 않더니,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더니 결국 가을은 오고야 말았다. 빛나는 생명들은 무서운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저마다 승리의 깃발을 들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고운 빛깔로 우리들에게 안겨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을 들녘에는 우리들 가슴을 훈훈하게 풀어주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알차게 여무는 곡식들을 보면 농부의 피땀 흘린 수고에 고개가 숙여지고 충만하게 가꿔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즈음 외진 들길에 피어 있는 야생초를 대하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은 청순한 자태를 보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우리네가 부끄럽기만 하다. 자연에 결실이 있듯이 인생에도 결실이 있다. 그래서 자식 기르는 일을 ‘자식농사’라고들 한다. 그런데 필자에게도 이번에 큰 결실을 안겨준 사건이 생겼으니… 자식놈이 나이가 차도록 장가를 못 들어 노심초사했는데 지난해 뜻밖의 횡재를 하여 예쁜 며느리를 맞아들였는데 지난 달, 생각지도 못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복덩어리 공주를 선물로 안겨 준 일이다. 과감히 도립 의료원 간호사 일을 접고 우리 집에 시집을 와 준 것만도 고마운데 귀엽고 귀여운 딸까지… 호박이 넝쿨 채로 들어온 기분이다. 집사람이 앞으로 며느리를 우리 집 ‘보배’로 부르자고 나에게 제안을 할 정도다. 우리 내외를 섬기는 일이나 가정 살림살이 정리정돈, 지극정성으로 아기를 보살피는 모습 등이 천사 같기 때문이다. 이 결실 하나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초석을 놓은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렇다, 계절적 결실도 있지만 인생의 결실 또한 여기에 못지않다.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는 일은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결실이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의 결실에는 정답이 없다. 시작과 결실이 끊임없이 순환 반복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빨리 커지는 나무가 있고 평생을 자라도 다 커지지 않는 나무가 있듯이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있고 인생의 이모저모를 폭넓게 체험하면서 뒤늦게 결실을 맺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 인생도 있다.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만큼의 최선을 다한 결실인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 가을, 들녘에 서서 무엇을 왈가왈부(曰可曰否)하겠는가? 다만 자연에서 풍겨오는 결실의 신비로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 가을을 만끽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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