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도 고향 동남촌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틋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태어나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고서야 떠난 고향. 고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26세에 고향을 떠나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그 당시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소대장 보직을 받으면서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부모님이 계실 때는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거의 매주 부모님 만나 뵈러 갔으나 혈육의 형제조차 살지 않는 지금은 갈 수 없는 고향, 더한층 마음속의 고향으로 남아있다. 그래도 마음만은 고향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김천문학’에 정선기 시인이 ‘고향이 그리워라’라는 수필에서 인용한 정지용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소리 아니냐고/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은 고향을 잃어버린 자의 상실감이다. 비애의 처절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 ‘김천문학’에 발표된 이승하 시인의 ‘내 고향 김천으로 가는 길’에서 가수 남상규가 부른 ‘추풍령’이라는 가요를 소개하며 1960년대의 노래일 것이라고 하고 있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위에서 이승하 시인은 고향에 가려면 기차를 타고 가든 버스를 타고 가든 추풍령을 넘어야 했고 이고개가 고향의 문턱이라고 했다.
이제는 이승하 시인도 1년에 네댓 번 밖에 고향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명절과 아버지 생신, 어머니 기일에나 내려가지만 김천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회한이 많이 든다고 했다.
이제 필자도 추풍령고개에 대해서는 많은 추억과 사랑과 애정이 틈틈이 박혀 고향을 떠나 살던 젊은 시절 고향에 발을 딛기 직전 추풍령휴게소에서 잠시 머물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추억이 되어 뇌리에 스친다. 이제 고향 동남촌 마을에는 부모도 형제도 아무도 살지 않기 때문에 추풍령 고개를 넘어 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은 더하고 애틋하다. 고향 동남촌에서 친구들과 계를 조직해서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고향마을 각자의 집에서 계추를 했으나 이제 한마을에 같이 살던 친구도 구미, 대구, 서울로 뿔뿔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모임도 고향 마을을 떠나 아포에 있는 식당에서 하기 때문에 마을에 들어갈 기회가 없어졌다. 지난해 12월 김정호 친구 집 앞에 있는 식당에서 계추를 했다.
김종록 부인, 황제오 부인, 황강석(2010. 2.22 작고), 홍학표, 김정호, 강철일, 정창운이 와서 옛날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모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이동희 박사의 영동황간농민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필자의 시 ‘추풍령 고개 너머’ 일부를 적으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한다.
젊은 시절, 혼자 아니면 가족 다함께/틈만 나면 추풍령 고개 너머/금릉군 아포면 제석동 903번지/고향 집을 찾아갈 때가 생애의 보람이었다.//그곳은 항시 꿈이 영그는 마을/늙으신 부모님께서 자식을 대하는/환한 웃음과 미소, 너그러움이 배어있는 곳!/친구들과 막걸리 한잔에/흥과 눈물이 배인 우정이 박혀있어/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 때는/차마 오기가 너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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