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운 대한, 전기매트 위에 배 깔고 엎드려 소설가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고 있었다. 마침 켜놓은 라디오에서 담낭암으로 투병 중이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80세의 연세로 별세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처럼 공허한 마음이 밀려왔다. 한 번도 본적 없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을 읽고 나면 친정어머니의 구수한 잔소리를 들은 것 같아 마음에 위로가 되고 머릿속에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곤 했었다.
어릴 때 어머니의 잔소리는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 그렇게나 싫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리워졌다. 춥고 몸이 무거울 때면 게으름을 피우다 누군가 정신이 번쩍 나도록 따끔하게 잔소리라도 해 주었으면 할 때도 있다. 어머니가 더 그리워진 건 박완서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 더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머니는 고추같이 매운 추위에 다가오는 설 명절이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마당에 버린 설거지한 물이 버쩍버쩍 얼어 어머니가 넘어지기 부지기수였다.
설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털신에 털목도리로 완전무장을 하고 쌀 한 말 머리에 이고 10리 길을 걸어 설 대목장을 봐 오셨다. 우리 칠남매는 양말 한 켤레라도 사오나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어머니의 장 보따리에는 제수용품 외에 사탕이나 과자는 없었다.
오로지 차례 상에 올릴 사과, 배, 오징어포, 김 한 톳 여유 없이 광주리에 담아 벽장 속에 넣어 두면 왜 그렇게 먹고 싶고 궁금하던지…. 벽장문을 확 열고 눈요기라도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벽장 앞에 장승처럼 떡 버티고 있어 감히 근접도 못했다.
조바심이 나면 실없이 콩나물시루 보자기를 걷고 주룩주룩 콩나물 물을 주었다. 그래도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어머니 밖에 없었다. 내가 입이 나와 있으면 어떻게 알고 옥수수 튀밥을 앞자락에 싸주며 마음을 달래주었고 아버지가 출타 중인 틈을 타 쌀 한 말 머리에 이고 곡물상회로 향했다. 어머니는 대목 밑에 잡화상인 영남내기 엿장수 아저씨를 기다렸다. 호박엿 외에 양말, 장갑, 목도리, 손지갑, 거울, 머리핀, 머리 방울 등 가득 싣고 영남내기 엿장수 아저씨가 오면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속바지 쌈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돈을 꺼내 양말과 머리 방울을 사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떻게 마련한 돈인지 감쪽같이 모르시는 것 같다.?
우리 집은 밥 차례를 지냈다 그래서 우리는 떡국차례 지내는 집을 부러워했다. 아버지는 양식이 준다고 떡가래 빼는 걸 싫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잔소리도 무시하고 떡가래를 빼러 가셨다. 아침 먹고 간 어머니는 캄캄한 밤이 되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가래를 머리에 이고 오셨다.
우리는 “웬 떡이야” 하며 꼬질꼬질한 손으로 기다란 떡가래 하나씩 받아 들고 한없이 행복했었다.
그해 설은 어머니의 반란으로 행복했다. 부엌에서는 구수한 명태 탕국 냄새가 새어 나오고 숯불에 구운 들기름 바른 바삭바삭한 김 맛을 보았고 쫀득쫀득한 떡가래 맛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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