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왕의 충성스런 종, 그러나 얼빵한 자라, 별주부가 뭍으로 올라와 기다리던 토끼를 만난다.
“토 선생, 우리 용왕께서 오래 전부터 토 선생의 특출한 지혜와 훌륭한 재주에 감탄하시던 차에 마침 이 번에 총리대신 자리가 비게 되어 토 선생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총리대신이라는 소리에 눈이 번쩍 귀가 번쩍 정신없이 자라를 따라 용궁으로 직행하여 용왕 앞에 나가자 용왕 왈 “내가 중한 병이 들어 네 간을 먹으면 낫는다 해서 너를 데려 왔으니 섭섭하지만 간을 내 놓아야 하겠다. 대신 너를 삼수갑산 명당에 앉히고 황금 동상과 황금 비석을 세워 너의 장한 이름을 세세토록 전할 것이니 죽는 것을 너무 원통하게 생각하지 말지니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기가 막혀 서러운 눈물이 뚝뚝 흘러 내렸다.
“왜, 죽는 것이 두려워서 우느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토끼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죽는 것이 원통하고 두려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서 웁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죽지 못해서 울다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들은 산 속에 살면서 늘, 호랑이나 여우, 산돼지, 너구리, 오소리, 늑대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같은 목숨인데 죽는 것이 뭐 그리 두렵겠습니까? 그런 하찮은 짐승에게 죽는 것보다 차라리 대왕님의 병을 고치는데 죽는 것이 훨씬 영광스런 일이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간을 육지에 두고 왔으니 그게 원통해서 눈물이 납니다.” 토끼의 어리석고 간교한 거짓말에 용왕이 어이가 없어서 빙긋이 웃었다.
“너 이놈 토끼야, 그런 바보 같은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아느냐? 간을 내 놓고 다니는 짐승이 어디 있단 말이냐? 어리석은 수단 집어치우고 냉큼 간을 내 놓을 것이니라.”
“용왕께서는 우주만물을 손안에 넣으시고 천지를 떡 주무르듯 하시는 분이시기에 세상에 모르는 일이 없는 지혜가 명철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육지에서는 저희가 간을 뱃속에 넣었다 빼는 것을 초동급부(樵童扱婦)도 다 아는 일인데 대왕께서 그걸 모르시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 간이 만병에 효험이 특출한 것은 사실입니다. 보름동안 뱃속에 넣어 두었던 간을 다시 보름동안 밖에 내 놓아 자연 산천의 맑은 공기를 쐬었기에 약이 되는 것이지 더러운 뱃속에만 넣어두면 무슨 약이 되겠습니까? 저 미련한 별주부놈이 진작 얘기했더라면 깨끗한 토란잎에 싸 두었던 간을 가져왔을 텐데….”
용왕이 듣고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젓고 있는데… 별주부가 “토 선생, 그럼 지금 육지로 나가 그 간을 가져옵시다.”
위기가 기회고 기회가 곧 위기라는 말이 떠 오른 토끼는 ‘이 때다’ 싶어? 짐짓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용왕님, 사흘 전에 간을 빼 놓았으니 아직 열이틀을 더 기다려야 자연산천의 싱싱한 기를 듬뿍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용왕은 토끼를 신임하게 되었다.
“여봐라, 토 선생을 영빈관에 정중히 모시고 열흘 동안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후히 대접하도록 하라.” 그 날 이후 낮에는 거북이 등에 올라 수중궁궐 안팎을 구경하고 밤에는 백년 고량주에 산해진미 진수성찬과 절세미인 궁녀들의 춤으로 대접을 받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열이틀이 후딱 가 버렸다.
“용왕님, 궁녀들 중 마음에 드시는 궁녀 둘만 육지에 내 보냈다가 용왕 옆에 두시면 자연산천의 정기를 받아 백 년 동안 무병장수 하실 것입니다.” …용궁에서 가장 예쁜 두 궁녀를 품에 안고 별주부 등에 올라 유유히 뭍으로 나온 토끼 왈 “이 멍청한 놈아, 세상에 간을 빼고 넣고 하는 짐승이 어디 있겠나? 용왕께 안부나 잘 전해라.”
늦도록 장가를 못 들어 노심초사 걱정하던 토끼는 잠시 총리대신 자리에 눈이 멀어 자칫 생명을 잃을 뻔 했다가 순간적인 지혜를 발휘하여 복에 넘치는 후한 대접을 받고 절세미인 두 부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