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나니 ‘더위야 물러가거라’ 하늘에게 불만이 늘어가는 요즘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체온이 올라가고 옷은 땀으로 흠뻑 젖기 일쑤다.
샤워를 해도 시원함은 그 순간뿐이고 옷을 입어야 하나 벗어야 하나 힘든 나날이다. 열이 많은 우리 사이인데 땀까지 많은 남편이랑 여름나기는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신경전을 벌일 때도 더러 있다.
남편을 생각해 주는 척 이마트에 가자고 했더니 영화 본다고 혼자 다녀오라며 거절한다. 남편과 같이 가면 필요한 것만 얼른 사고 올 때가 많다. 그러나 거절을 당하고 혼자 쇼핑을 하게 되니 기회다 싶었다. 이왕 간 김에 매장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따져서 필요한 것을 사기로 했다.
그러다 각가지 여름용품이 있는 곳에서 번쩍 죽부인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가격도 괜찮고 해서 죽부인을 먼저 골랐다. 우리 남편과 여름을 보낼 새 부인에게 후하게 새 이불도 사 주고 싶었다. 한 눈에 봐도 예쁘고 시원해 보이는 걸로 덜컥 두 장을 골랐다. 카트기에 넣고 보니 집에서 나올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상상을 하며 매장 안을 실실 웃고 다녔다. 각 층에서 필요한 것을 고르다보니 카트기에는 상품들이 많아졌다.
일단 계산을 하고 차에 구매한 물건을 옮겼지만 우리 아파트 지상주차장에서 집 안으로 한꺼번에 옮기는 것이 문제였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10분 후에 우리 통로 주차장으로 좀 내려와요”하니까 낮잠을 잔 목소리였다.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차 안을 보더니 얼굴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실컷 필요한 것 고른다고 애썼는데 수고했다는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분 좋게 쇼핑하고 와서 내 기분도 금세 나빠지기 시작했다. 잠을 잔 얼굴과 화난 얼굴은 다른데 “얼굴이 왜 그래?”하고 물었다.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가 “돈 잘 쓰고 다닌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잖아. 먹는 것도 좋지만 편하게 자라고 눈에 띄어서 샀거든요” 그랬더니 굳은 얼굴이 어느 정도는 밝아졌다.
내 얼굴도 덩달아 펴졌다. 남의 속도 모르고 낮잠만 늘어지게 자놓고 말이야. “나 없다 생각하고 한 번 살아 봐. 새 부인한테 내 자리를 줄까 하는데 당신 괜찮지?”하니 “정말 그래도 돼?”라고 기다렸다는 듯이 말장난을 걸어 왔다. 남편은 말로만 듣던 죽부인을 처음 가져 보는데 23년 만에 아마도 새로운 기분이겠지. 이러다가 나 다 잊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큰 방으로 홑이불과 죽부인을 슬쩍 갖다 놓는 남편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귀하게 모셔다 놓지만 말고 누워서 한번 안아 봐. 그 기분이 어떤가?”
멋쩍어 하더니 아이들 마냥 금방 “우와! 되게 시원하고 좋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 새 부인을 맞아들였으니 빨리 정 붙이고 어디 신나게 뒹굴어 봐라. 허리가 좀 굵어졌다고 이젠 살 좀 빼면 안 되냐고 노래를 불러 댄다. 내 생각하는 말이지만 내가 찌고 싶어서 쪘는가? 추석까지 내기를 걸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내가 질 것만 같다.
말 못하는 새 부인은 나처럼 잔소리 하지도 않고 눈치까지 빨라서 당신은 참 좋겠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방문을 열어 놓은 채로 보란 듯이 저러니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한다. 죽부인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다정스럽게 껴안고 자는 모습이 나보다 더 만족하다는 표정이다. 그래봤자 집 안에서 저러는데 예쁘게 봐줘야지 어쩌겠는가?
남편이 사용하지 않을 때는 옆으로 누워 한번 안아 보았다. 다리를 얹는 순간 시원하며 품에 딱 안기는 것이 정말 잠 잘 오게 생겼다. 열이 없는 부인이라서 그렇겠지.
탁월한 선택인가. 남편을 위해 올 여름은 내 자리 기꺼이 빌려줬지만 새 부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살고 있는 요즘이다. 밤새도록 편하게 자고 난 뒤 나한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저 뻔뻔한 얼굴 좀 봐. 1만3천800원으로 올 여름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데 더 일찍 사 줄 걸 그랬나 싶다.
저러다가 찬바람 불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남편에게 지금은 멋지게 기회를 주고 있을 뿐이다.
*죽부인은 대(竹)를 쪼개어 매끈하게 다듬어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옛 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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