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문제였다. 명절날만 아니었어도 잠잠했을 텐데,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곱단이 할머니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등으로 하루 종일 눈물을 닦아내셨고 큰소리 뻥뻥 치던 박씨 할아버지 역시 식사도 거부하고 내내 풀이 죽어있었다. 평소 말 한마디 안하던 송 할머니까지 하루 종일 창밖만 뚫어져라 내다보다가 결국 침대에 돌아눕고 말았으니 노인시설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한 보름 전부터 이상하게 들떠있었다.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가며 그렇게 손꼽아 기다렸건만 노인시설에 남아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마음은 그 어떤 위로로도 달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모두 자식자랑에 젊은 시절이야기로 꽃을 피워왔었는데 6.25사변 이야기와 젊은 날 군대 생활이야기가 단골 메뉴였다. 할머니들은 곱디고운 아낙내의 모습으로 돌아가 송편 빚는 이야기에 소 팔고 논 팔아 올망졸망 아이들 키운 이야기까지 끝도 없는 옛날이야기로 설레는 며칠간을 보냈었다.
추석날이었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석 보내십시오’라는 현수막이 아파트마다 붙어 있었고 오랜만에 자식 곁으로 돌아가 가족의 울타리에서 그냥 하룻밤 자고 온다는 기대감으로 어린아이들처럼 잠을 설치는 것 같았다.
그동안 꽃할머니도 (꽃을 너무 좋아해서 붙여진 별명) 아들 셋에 딸 둘이니 하루는 큰아들네 집에 가서 자고 하루는 큰딸 집에 갈 거라고 삼일 전부터 가방을 챙겨 머리맡에 두고 주무셨는데 그만 자식이 못 온다는 전화 한통만 왔다. 곱단이 할머니도 새벽같이 일어나 머리 곱게 빗고 문만 열면 바로 나갈 채비를 하고 기다렸는데 그만 자식이 오지 않고 말았다.
같은 방을 쓰던 네 분 중에 두 분은 의기양양 자식들 앞세우고 외출 나가셨고 끝끝내 오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눈물로 하루를 지새우셨다. 추석날 집에 가서 차례 상을 모시고 오고 싶다던 그 바람은 물거품으로 돌아 간 것이다. 송 할머니가 하도 팔을 잡고 “우리 아들에게 나 좀 데려가라고 전화해 주세요. 아니면 잠깐 우리 집까지 차만 태워 주면 되는데…”라고 하시기에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더니 “떡집을 하는데 도저히 바빠서 안 된다”고 했고 둘째아들도 “특별휴가를 받아서 해외여행을 갔다”고 했다.
아들 딸 입장에서는 다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부모는 평소에는 그렇다 손치더라도 명절만이라도 집에 가고 싶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요즘에는 명절의 개념보다는 연휴의 개념이 더 크긴 하지만 이쯤에서 부모 세대의 명절을 한번 생각 해 봐야겠다. 고령화 사회의 특별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흔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노인요양보험이나 사회적 제도가 워낙 좋아서 집보다 더 잘해주는 요양시설도 많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 젊음의 뒤안길에 선 서걱서걱 갈대 같은 어르신들의 눈물을 보니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린다.
부모는 그저 자식 사랑하는 해바라기 사랑인 것 같다. 하지만 자식 입장에선 아등바등 하루하루 쫒기며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보니 부모생각 하면 마음 아프지만 또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는 것이지 않을까. 추석날 보름달을 보러 밖에 나갔다가 남편과 둘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은 쏘아 놓은 화살처럼 날아가지만 우리는 더 이상 늙지 말고 건강하게 지냅시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 들어도 자기 정신 놓지 말고 누구 먼저 앞세우지 말고 짱짱하게 삽시다”라고.
김만중 님의 글을 보면 “오늘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자고 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이 흥건하다”고 했다. 심순덕 님의 글 중에는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덩이 홀로 대충 부엌에 앉아 점심을 떼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나를 낳아 주시고 애지중지 길러 주신 부모님… 어쩌면 내년 추석에는 살아있는 엄마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무덤에 가서 목 놓아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온갖 곡식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그 열매가 익기 전까지 생각해 보면 모두다 뿌리 덕분인 것 같다. 자식의 뿌리는 분명 부모일 것이다. 한번쯤 더 부모를 생각하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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