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사과가 노을을 빨아 당기고 있다. 저 멀리 지평선은 잠시 시간을 멈추고 있는 듯하다. ‘일곱 시입니다’ 휴대폰 멜로디가 울고 있다. 두 번만 더 울면 오늘은 더 울지 않을 것이다. 착하고 냉정한 프로그램은 내일 아침 여섯시까지 잘 참아 낼 것이다. 그 사이 새벽 한 시쯤에는 난 잠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습관이라는 녀석이 두세 시쯤 나를 깨워 준다면 좋겠는데…. 그보다도 잠자는 동안 하루의 혼미를 안락하게 해준다면야 더 고마울 따름이다. 이른 새벽잠에서 깨면 비도 안개도 세상을 구별하지 못함을 볼 수 있다. 말없이 그냥 내릴 뿐이다. 휴대폰도 고요함을 느끼면 시간을 알리지 않는가 보다. 물론 조금 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세상과 휴대폰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딸각거릴 것이다. 그것은 지정해 둔 알람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딸각거리지 않는 이 깊은 새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굴 같은 시간이기에 항상 깨어 있으려 노력한다. 며칠 전, 딸각거리는 세상처럼 누가 나를 찾아 왔다. 어릴 적부터 잘 아는 승호였다.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평소의 꿈이라며 고향을 무한정 사랑한다는 그는 정치에 뜻을 두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농부이고 그는 정치에 뜻을 두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긴 시간 우리 비닐하우스 농막 ‘초우당(草雨堂)’에서 술로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초우당은 가끔씩 가까운 이웃이나 지우가 찾아오면 차와 술잔을 나누는 곳으로 각종 야생화, 서재와 다기가 있는 나의 특별한 공간이다. 술기운이 돌자 그는 추사를 얘기하고 나는 다산을 논했다. 급기야는 안철수도 도마 위에 오르고 소설가 황순원과 작가 강준용의 맑은 글에 대해서도 얘기하였다. 막걸리가 수차례 빙빙 돌아 오랜만에 정말 살맛나는 세상으로 거슬러 오른다. 2002 월드컵 경기 때의 함성, ‘쏴와’ 울리는 것 같다. 도대체 축구가 뭐길래 이토록 우리를 부둥켜안게 했는가. ‘민주’를 부르짖으며 스크램을 짜고 함성을 울리던 시위대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고 했었다. 민주보다 더 살맛나는 세상은 없을까!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도 시장기가 돈다. 아, 갑자기 쫄면 생각이 난다. 단맛과 매운 맛이 고샅길 여운 같은 어릴 적 그 쫄면이 먹고 싶다. 술잔이 오고 가는 자리에 두둥실 연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봄이면 개울가에는 버들붕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복사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온 산이 붉었다. 찔레꽃 향기가 싸아하니 오솔길에 떨어지고 아이들은 개울 옆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모닥불에는 발갛게 가재가 익어 가고 있었다. 바스락, 아이들이 한 가득 가재를 깨무는 소리에 오르던 술이 쨍하며 깨는 것 같았다. 살맛나는 세상, 모두의 마음속에 품어지기를 바라며 후배와 마지막 잔을 비웠다. 오랜만에 마신 막걸리 맛이 참으로 구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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