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 넘쳐나도 새참으로 막걸리가 빠지면 뭔가 서운하다. 김치, 부침개, 두부, 도토리묵 아무거나 잘 어울리지만 안주가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다. 들일을 하고 배고픔을 달랠 겸 목구멍으로 들이키는 그 맛은 맹물보다 간이 잘 맞아 맛있다. 유년시절에 농사가 많아서 체험활동은 늘 있던 일이었다. 아버지는 밭에서 왕복 1시간 거리에 있는 구멍가게까지 막걸리 심부름을 가끔 보내셨다. 노란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서 걸으면 무겁기도 하고 덥기도 했다. 밭에까지 가기도 전 주전자에 입을 대고 아버지보다 먼저 맛을 보기도 했다. 막걸리의 양이 줄어든 걸 아시면 혼날까 봐 용화사 샘물을 넣을 때도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밭에 가면 엄마는 같은 양이라 매번 내게 속는 줄 모르셨다. 아버지는 맛이 좀 묽다 하시는데 난 태연히 모른 척 했다. 엄마는 내게 미숫가루 대신 막걸리에 사카린을 타서 새끼손가락으로 저어 주셨다. “우리 돼지도 더운데 조금만 먹어 봐라.” 달짝지근한 그 맛 때문에 그때부터 막걸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린 생각에 아버지가 한 잔을 단번에 드실 때 턱으로 흘러내린 막걸리를 손 등으로 닦으시는 모습에 막걸리가 참 맛있어 보였다. 막걸리가 맛있다고 하니까 엄마는 “애가 술 즐기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도 귀찮을 정도로 술 빵을 자주 해 주셨다. 빨간 보자기를 깔고 발효된 반죽 위에 강낭콩을 얹어 찌면 빵에 물이 들고 술 냄새가 술술 나는 게 그저 좋았다. 식구가 많아서 몰래 먹으려 찬장에 감춰 놨다가 잊어버리고 한참 후에 보면 곰팡이가 핀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술을 전혀 못하시는 엄마가 딸에게 길들여 준 막걸리, 나는 여전히 막걸리파다. 엄마는 담배를 좋아하셨지만 산소에 들릴 때면 막걸리를 많이 드려 엄마를 취하게 한다. 여름 어느 날 TV에서 ‘순희막걸리’ 광고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내가 우리 술 막걸리를 좋아한다고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보해양조에서 순희막걸리를 출시해서 참 반가웠다. 순희 더 살 맛 났다. 순희가 순희 더 찾게 생겼다. 철수막걸리도 나오면 매출도 증가할 텐데 말이다. 흔한 이름이라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기발한 광고까지 나오다니~ 그 광고를 보고 언제 순희막걸리가 눈에 띄면 그 맛을 꼭 보고 싶었다.
그 이후로 하나로 마트에 갔다. 생각보다 빨리 시판된 순희막걸리를 보게 되었다. 누가 다 사갈까 봐 본 김에 몇 병을 얼른 샀다. 맛을 봤더니 나처럼 부드러웠다. 이전 막걸리는 텁텁한데 요즘은 음료수처럼 마시기 좋아 젊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편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지글지글 부침개와 함께 더욱 생각나는데 오늘 김장 끝내고 주점을 펴 볼 생각이다. 대숲막걸리, 은자골탁배기, 생탁우국생, 국순당 이동막걸리(쌀 더덕 인삼) 맛은 다 봤는데 너들은 이젠 안녕이다. 아무래도 앞으로 내 이름만 찾을 것 같다.
얼마 전 남편이 큰 딸과 함께 대구에 영화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정화가 집에 오더니 “엄마 오늘 점심 먹으러 숯불갈비 집에 갔다가 웃기는 일이 있었어요” 하는 것이었다. “뭔데?” 하니 옆자리의 아저씨들이 “순희 하나 더” 해서 “어? 우리 엄마를 왜 부르지” 하고 쳐다봤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냉장고에서 순희 막걸리를 꺼내시는 걸 보고 막걸리 이름이 순희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 지금 순희막걸리 다섯 병이 언제 팔리나 기다리고 있다. 같이 마시고 싶은 사람은 순희 찾아주세요. 최고의 행운을 드립니다. 여러분께 드립니다. (낮 손님 선착순 1명) 뚜껑은 바로 열면 됩니다. 뚜껑에 꽝이나 다음 기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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