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을 땐 몰랐는데 식당엘 가니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난다. 여기저기 왁자지껄 박수소리도 나고 신발장이 빼곡하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남편의 동문회 가족 모임이니 사실 나로서는 별 재미있는 자리는 아니다. 그런데 몇 번씩 봤던 얼굴이라 그런지 금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이 핀다. 어떤 이는 3개월 조깅으로 8kg을 뺐다 하고 어떤 이는 3개월 만에 5kg이 불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아들이 고3이라 걱정이라 하고 어떤 이는 딸이 간호사로 큰 병원에 취직을 해서 한시름 놓았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일들, 어쩌면 아주 소소한 일들까지 술잔에 부딪친다. 선배님 후배님 하며 건배잔들이 한 바퀴 돌고 나니 자연스레 그 중 친한 사람들끼리 같은 테이블에 모여 앉는다. 내 앞에 있는 분은 나이에 비해 왜 그렇게 늙어 보이는지 속으로는 후배가 아니라 한참 선배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휴~우 한숨을 쉬며 넋두리를 한다.
“사업하다 실패하여 감방 생활을 며칠 했는데 진정 나를 도와줄 친구가 정말 없더라”라며 그렇게 씁쓸해 했다. 인생을 살면서 절친한 친구 두 명만 있으면 잘 사는 것이라 했는데 잠시 내게도 정말 감방에서 구해줄 만한 친한 친구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는 데 다른 테이블에서 또 건배제의를 한다. “돈 잃으면 반을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해 건배!” 아내고 남편이고 모두 소리 높여 건배를 또 외쳤다. 건강…. 얼마 전에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신 김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 곱디고운 분이 아직 환갑도 안 지났는데 그냥 아픈 지 6개월 만에 떠나 버린 거다. 돌아가실 때 머리카락도 한 올 없는 자기의 볼품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으셨던 그 연꽃 같은 분이 떠올랐다. 그러자 총무의 회계보고가 있었다. 기념타올 한 장씩 받고 나자 삼삼오오 자리를 일어선다. 우리도 악수를 진하게 하고 “선배님 잘 가세요” “후배님 또 만나요” 하며 탁탁 어깨를 쳐주고 송년회 자리를 나왔다.
자동차에 와서 술 몇 잔 안 먹었으니 남편은 그냥 운전 하겠다고 하고 나는 대리 운전 부르자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는데 아까 그 사업에 실패했다는 후배가 터덜터덜 걸어 나온다. 부르릉 시동을 거는데 트럭에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매연만 부릉부릉 나온다. 가슴이 짠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족들 데려 왔는데 그는 혼자 왔었고 여기 오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싶으니 뒷모습이 참 허전해 보였다.
차를 타고 오며 밤은 늦었지만 나도 김 선생님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예. 그저 그렇죠.” “식사는 어찌 챙겨 드시나요?” “예. 딸네 집이고 아들네 집이고 좀 가봐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나 혼자…. 이제 적응 해야죠” 하신다. 그리고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아~ 예, 예”만 하고 있는데 한숨을 크게 쉬더니 “원장님도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뭐 책임감이고 뭐고 하는 것들 때문에 내 몸 돌보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그저 별 것 아니면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우리 집사람 보내고 나니 후회가 막급합니다. 이제 좀 여행도 다니려 했는데…” “예~예. 그래요. 그렇지요.” 전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막막한 이야기 속에 인생의 무상함이 새록새록 피부에 와 닿는다.
한해가 또 저문다. 어쩌면 인생에 있어 쉼표 하나씩 늘어가는 악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까운 분들과 따뜻한 김치찌개라도 한 그릇하며 열심히 살아온 인생의 쉼표를 또 예쁘게 찍어보자. 그리고 다음 악보는 더 빠르게가 아니라 더 느리게, 그리고 더 감미롭게 아름다운 악장을 그려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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