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시즌이 다가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의 아버지가 아들의 졸업장과 앨범사진을 구경하다가 아이들이 쓴 글모음 공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공책에는 졸업을 앞두고 주고받은 글들을 복사하여 모은 것이었는데 이것저것 뒤적이던 중 흥미로운 것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20년 후의 담임선생님은 어떤 모습일까”하는 것을 묻는 앙케트를 발견한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기상천외의 기발한 표현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하는데…. ‘천국, 아니 지옥으로 갔거나 아니면 늙은 할아범으로 양로원에서 살아 있을 것’‘꽥, 저승사자’‘무덤 속에서 ㄲ ㄲ ㄲ ㄲ’‘늙어빠진 할아버지’‘중풍+노망’‘거지가 되어 우리 반 아이 집에서 살 것이다’‘죽었겠지 뭐, 관심 없다’‘관속에 계실 것이다’‘뼈와 틀니만 남겠지’등등. 연세가 많은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겠지만 이렇게 거칠고 삭막한 표현이 여과(濾過)없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간혹 ‘우리 교장 선생님 같은 인자하신 분’‘손자를 데리고 다니는 점잖은 분’‘초박력, 멋진 할아버지 왕’같은 표현도 발견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심성이 뒤틀려 있는 표현이었다. 물론 일부의 반 장난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들의 앙케이트 글모음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풍속도로 생각되어 그 아버지는 착잡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졸업식만 봐도 그렇다. 삼사십년 전, 60∼70년대의 졸업식장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었다. 재학생의 송사와 졸업생의 답사는 졸업식의 엄숙한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도 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송사, 답사는 물론 졸업식 노래도 대부분 사라졌다. 오랜 기간 동안 형설의 공을 쌓고 영광의 졸업을 축하하는 마당에 어쩌면 축하의 박수로 격려하는 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이치에 더 맞을는지도 모른다. 졸업식 풍속도가 현실에 맞게 달라진 것이야 어쩌겠는가? 오히려 변하는 것이 더 발전적이고 당연하다고 보겠다. 다만 무턱대고 옛 것에 안주하려고 미련을 대는 것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고집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적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심성이나 사고방식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한 현실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오늘의 교육 현실은 학교 폭력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귀로에 서 있다. 학교 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교실에서 아이가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손을 내리고 바로 앉아서 들으라고 한다. 아이는 앉은 채로 “왜요?”라고 대꾸한다. 아이는 똑바로 앉아서 듣는 것과 턱을 받치고 앉아서 듣는 것이 뭐가 다르냐고 선생님에게 되묻는다. 선생님은 그 말에 적절한 대답을 궁리하다가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듣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머리에 잘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웃음에는 어쩐지 쓸쓸하고 맥 빠져 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청소 지도를 하면서 직접 휴지를 줍고 있는데 아이들이, “선생님, 여기도 있네요. 저기도 있네요.” 하면서 휴지 있는 곳을 지적해 주더라는 이야기…. 운동회 날 담임선생님이 자기반 아이에게 “엄마 오셨나?” 하니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또, 뭐 얻어 잡수시려고요?”라고 되묻는 어린이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선생님에 대한 모습은 어떻게 각인되고 있을까 싶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그것인데 이것마저 깡그리 무너진 현실이 우리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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