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꽃 두 송이를 그녀에게 주었네./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서./ 내 사랑! 그 꽃은 당신과 나의 심장이 될 거요.” -쿠바 이브라힘 페레르의 노래 ‘치자꽃 두 송이’ 치자나무 가지 끝마다 새로 난 작은 잎들이 성큼성큼 커지더니 이내 연둣빛 새잎으로 나무를 덮어버렸습니다. 유월에 보드라운 연둣빛 잎새를 가진 것은 아마도 늦잠꾸러기 대추나무와 치자나무 밖에 없지 싶습니다. 엊그제 외출했다가 밤늦게 귀가하는데 화단에 샛별 몇 개가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눅진한 공기를 일시에 걷어내고 발랄한 햇살이 쏟아지듯 치자꽃 몇 송이가 피어난 것입니다. 여섯 장 순백의 꽃잎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모습은 고요한 밤하늘에 휘영청 만월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치자꽃 향기는 이때까지 맡아온 여느 꽃향기와는 많이 다릅니다. 누군가는 ‘꽃향기의 충격, 사랑의 폭탄’이라고 했습니다. 치자꽃 향기는 캔디처럼 달콤하고 선녀의 날개처럼 부드럽습니다. 작은 아이스크림 같은 치자꽃망울에는 일천 개의 사랑과 희망이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유월의 문턱에 꽃문을 여는 치자꽃을 보면, 그 발아래 엎드려 경배하고 싶습니다. 순백의 꽃잎 가운데 오똑한 연노랑 꽃술은 얼마나 앙증맞은지 모릅니다. 꽃술은 콩알처럼 두 쪽으로 갈라져 어디가 암술인지 수술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치자꽃 한 송이 똑 따서 입 안에 넣으면 마시멜로처럼 사르르 녹아버릴 것 같습니다. 치자꽃은 화이불치(華而不侈)입니다.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습니다. 치자꽃은 주이불비(周而不比)입니다. 두루하되 편 가르지 않습니다. 무수한 사막과 바다, 산과 들을 지나서 새삼 발견한 치자꽃이기에 더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 사랑 치자를 만나게 해준 삶이여! 감사합니다!”라고요.
조선시대 풍류객이었던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고아한 것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요, 요염한 것은 모란, 해당화이고, 청초한 것은 옥잠, 목란, 치자”라고 했습니다. 또, 강희안은 ‘양화소록’이란 책에서 치자의 네 가지 아름다움에 대해 말했습니다. “첫째, 꽃빛이 희다. 둘째, 향기가 맑다. 셋째, 겨울에도 낙엽지지 않고 윤기 나는 싱싱한 푸른 잎이 있다. 넷째, 황금색 물감으로 쓰이는 열매가 있어 꽃 중의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술잔 같이 생긴 열매가 나무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해서 ‘잔 치(梔)’에 ‘나무 목(木)’자를 붙여 ‘치자목’이라고 합니다. 황금빛 열매가 달리는 꽃잎이 홑잎인 치자 외에 열매가 달리지 않고 꽃잎이 겹으로 된 ‘천엽치자’라 불리는 치자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치자나무 몇 그루를 주문했더니 홑치자가 아니라 겹치자가 배달되었습니다. 내심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치자나무라 하면 당연히 열매가 달리는 홑치자인 줄 알았거든요. 나의 실망을 모르는 척 겹치자는 우리 집에 오자마자 고 작은 몸매에 보란 듯이 아홉 개의 꽃을 야무지게 피웠습니다. 향기는 홑치자보다 더욱 은밀하게 달콤하고 꽃은 작은 백장미와 같지만 더 우아하고 정갈합니다. 꽃받침처럼 둘러선 여섯 장의 큰 꽃잎 위에 소복소복 피어난 순백의 꽃잎들은 근접할 수 없이 고결합니다.
나의 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겹치자가 홑치자보다 훨씬 예뻐요. 왜냐면 첫사랑처럼 홑치자 보다 먼저 본 꽃이니까요.” “겹꽃보다 홑꽃을 좋아하지만 치자만은 예외야. 나는 겹치자가 홑치자 보다 더 좋아.” “홑치자가 진짜 치자지. 겹치자는 열매도 안 달리잖아.” 이제 저도 슬그머니 첫사랑 홑치자에서 마음이 겹치자 쪽으로 슬금슬금 옮아갑니다. 춤추듯 경쾌한 꽃잎과 황금빛 열매를 보면 홑치자가 좋고, 탐스럽고 고결한 꽃잎을 보면 겹치자가 좋습니다. 이제 황희 정승처럼 “겹치자도 좋고 홑치자도 좋다.”라고 말하렵니다. 여건이 허락하면 모두 뜰에 심어서 아침저녁으로 “내 사랑, 치자야!”라고 부르면서 함께 늙어가고 싶습니다. 먼 기다림의 강을 건너서 치자꽃이 피어나는 유월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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