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해보다도 추운 겨울, 폭탄 눈이 쏟아져 비닐하우스가 내려앉고 전국적인 교통대란에다 곳곳에서 상하수도관이 동파되는 등 유래 없는 한파가 전국을 강타해 우리 같은 서민들을 꽁꽁 묶어 놓고 있다.
입춘이 지났는데도 아직 동장군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렇게도 풍성하고 싱싱했던 나무들도 때가 되니 초라하고 안쓰럽기가 이를 데 없다. 조물주만이 해결할 수 있는 삼라만상인데, 계절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감히 어느 누가 간섭하랴? 늦겨울의 앙상한 영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가깝고 먼 산야의 정경을 계절의 순환에 잇대어 보는데, 이즈음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눈얼음 얹힌 가지들이 추위에 움츠리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애잔하기만 하다.
지난날, 갓 태어난 아기의 볼처럼 맑고 깨끗한 연녹색으로 수를 놓아 봄의 향연을 베푼 적도 있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을 기세로 늠름하고 싱그럽던 긴 녹음의 터널을 빠져나와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절경을 발산했던 만추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서 으스대기도 했건만… 이젠 마치 유아기와 청소년, 청장년, 노년을 거쳐 인고의 세월을 훌쩍 넘기고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느라고 파르르 떨고 있는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세상만사 신산인고(辛酸忍苦)에 귀결되고 있음을 절감케 한다.
그러나 살을 에는 혹한 속에서 저렇게 실오라기 한줄 걸치지 않은 나목(裸木)을 바라보면서 한때는 배춧잎 푸른 지폐더미를 감당 못할 만큼 부를 축적하던 재벌이 하루아침에 빈 털털이가 된 졸부를 연상도 해본다. 융성과 번영보다는 쇠잔(衰殘)과 몰락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을 자아내게 한다.
지난 가을,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의 선율이 상실의 아픔으로, 몇 그루 남은 야생황국(野生黃菊)은 노란 미소를 머금은 채 오상고절(傲霜孤節)로, 말라비틀어진 코스모스는 여기저기 제멋대로 가지들을 처박고 있을 때도, 갈 곳을 잃어버린 풀벌레들이 힘이 다 한 듯 몇 마리씩 떼를 지어 메마른 잡초 속을 맥없이 기어 다니고 있을 때도 이렇게까지 안쓰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저 겨울 나목에 마음이 송두리째 빼앗기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갑자기 이육사님의 시 ‘절정’이 떠오른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었던 일제시대에 처한 우리민족과 겨울나목이 마치 동병상련의 관계에 처한 것 같은 느낌이 일어난다. 어딜 가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홀라당 맨몸으로 버티고 있는 저 나목(裸木), 차가운 하늘을 향하여 마지막 목청이라도 뽑듯 앙상한 가지를 내뻗은 채 너무나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들의 입상이야 말로 연민의 정을 뛰어넘어 존경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저렇게 해야만 새봄을 맞을 자격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새 옷으로 갈아입기 위하여 엄청난 역경과 고난을 지혜롭게 이겨내는 놀라운 자연의 섭리 앞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우리는 너무나 초라하고 연약함을 실감한다. 요즘 같은 겨울, 벗은 몸으로 하루, 아니 단 몇 시간을 버틸 누구도 없다. 그저 저 겨울 나목에게 삼가 경의를 표할 뿐이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보석 같은 존재들을 위해서 더 낮은 자세로 겸손해질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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