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반드시 세상에 있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시가 일용할 양식이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처럼 그렇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시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온전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어떤 순간은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과 속도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세상에서 그래도 다른 아름다움의 척도가 있음을 짐작해 보는 경험은 소중하다. 시는 언어를 극도로 예민하게 사용하면서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그 투명한 언어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면 함부로 쏟아지는 이 세상의 넘치는 말의 허위를 서늘하게 바라볼 수 있다. 시를 읽으면 일상 속에서 무수히 뱉어낸 자기도 알지 못하는 관념이 문득 부끄러워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시를 쓰는 사람의 수와 시를 읽는 사람의 수가 비슷하다는 씁쓸한 농담은 시를 둘러싼 문화적 상황을 말해준다. 시보다 상품가치가 앞선 시대에 시의 위축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쑥스럽다.
대형서점에서 시집 코너가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시를 사랑한다는 찬사는 이제 민망한 것 같다.
시를 쓰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독자는 시로부터 많이 떠난 것 같다. 영상매체의 득세로 문화적 환경이 변화한 가운데 새로운 시대의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화법을 찾지 못한 것도 원인이 아닌가 싶다.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가 시의 시간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있다는 게 문제다. 삶의 구조가 시의 시간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한다. 무서운 속도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를 통해 작고 의미 있는 정지의 순간을 경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시를 읽는다. 촉촉한 위안의 말을 구하기 위해서 삶을 지탱할 단단한 지혜의 잠언을 얻으려고…… 연인에게 전할 달콤한 말을 찾기 위해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를 읽는 이유가 하나일 수는 없다. 그래도 시를 읽는 독자가 아직 이 땅에 있다는 점은 감사한 일이다.
오래 전에 돌아간 오규원 시인이 죽음을 앞둔 병실에서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눌러 써 준 마지막 시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를 얼마 전 어느 문학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더 잃을 것이 없는 한국시에 대한 암시처럼 함부로 읽었다. 중요한 점은 어떤 영상 매체도 시인의 이 절제된 문장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고 이 문장을 재현 하려 한다면 그는 이 말의 투명한 깊이 앞에서 절망할 것이다. 그것이 언어를 통해 사람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할 이유이며 결코 시를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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