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30년 전 우리 식구는 단칸 셋방에 살고 있었다. 14인지 TV, 비키니장, 선풍기, 문갑을 놓고 남은 자리에 세 식구가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한 집에 네 집이 살았는데 문만 열면 서로 안이 보여서 발을 치고 살았다.
아침이면 마당에 있는 공동 수도에서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빨래하느라 북새통이었다. 남편은 그게 싫다며 수건 들고 근처 계곡으로 갔다. 화장실도 네 집이 같이 쓰느라 남편은 출근할 때까지 참았다가 회사에서 볼일을 해결하곤 했다. 다른 집 사람들과 부딪치기 싫었는지 누구보다 일찍 일터로 나갔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아 당연한 일이거니, 질서를 지키며 잘 지냈다. 주인집 아줌마는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 분이어서 과자라도 생기면 꼭 나누어주었다. 그 집에 살면서 정말 많이 얻어먹었다. 안채에는 화장품 장사를 하는 주인아줌마와 1남 2녀 삼 남매가 방 두 칸에 살았고 옆방에는 신혼부부가, 맞은편 방에는 60대 부부가 살았다.
모두 학교와 일터로 나가고 나면 나와 갓난 아들만 남는다. 그러면 나는 마당에 나가 빨래를 했다. 기저귀를 연탄불에 삶아 방망이로 펑펑 두드렸다. 뽀얗고 보송보송한 빨래를 걷을 때면 기분이 너무 좋았다. 문제는 비 오는 날이었다. 빨래를 방에 널고 선풍기를 틀기도 했고 연탄불에 말리기도 했지만 장마철에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아기 기저귀여서 빨래를 미룰 수도 없었다. 그게 안쓰러웠는지 주인아줌마가 자기 세탁기로 탈수하라고 배려해주었다.
하루는 탈수를 하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다.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라 몸이 굳어버렸다. 주인아줌마가 마음을 써준 것인데도 너무 소심해서 그 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1년 반이 지나 독채로 이사하고 나니 마음대로 빨래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마당이 있는 넓은 시골집에 살고 있다. 단독주택이어서 밤이고 낮이고 이웃 눈치 보지 않고 빨래할 수 있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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