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법정 스님의 ‘비 오는 새벽에’ 중 한 구절이다. 스님 말씀처럼 한 평생 이 세상을 아름다운 마음으로 꾸미고 계시는 분이 내게는 한 분 계신다. 하필 그 분과의 인연은 비가 오는 날 시작되었다.
이제는 기억도 까마득한 고교 시절, 내게는 비만 오면 나타나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그것도 한 선생님의 수업시간에만 유독 그 버릇이 떠올랐다. 한 시간 내내 선생님의 열정어린 강의 목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분위기 잡고 내리는 빗줄기를 인테리어 삼아 습작을 했던 것이다. 뭐가 그리 아프고 힘든 사연들이 많았을까? 공책 몇 장을 순식간에 채워 어린 영혼의 배고픔을 달래곤 했었다.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치며 몸도 마음도 고달팠던 현실을 벗어던진 채, 때로는 비련의 주인공으로 또 백마 탄 왕자님이 되기도 했던 짜릿한 기억들을 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가끔 떠올려본다.
세월이 흘러 나도 그 시절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고 또한 교육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비가 내리면 많은 학생들이 강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상념에 휩싸이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애써 외면하며 어느 때보다 판서에 집중하는 내 모습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도 한참 시간이 흘러 비오는 어느 날, 그 시절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어깨가 축 처진 가엾은 제자를 위한 귀한 배려였다는 것을 나 역시 지금의 학생들에게 그 깊은 마음을 내리 사랑으로 전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도 가끔 드라마 같은 일들이 펼쳐진다. 몇 해 전이던가, 항상 마음속으로 감사의 마음만 지닌 채 언젠가는 꼭 한번 봬야겠다고 다짐만 가졌던 은사님께서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나타나셨다. 동료교사 몇 분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남도여행을 오시면서 3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의 안내로 잠시 들리신 것이다. 물론 그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사연들을 전혀 모르고 계셨다. 하지만 잠시 동안의 방문이신데도 몇 권의 책을 선물로 준비해 오셔서 고향에서 멀리까지도 제자가 살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하시며 훌륭한 스승이 되라고 격려해주셨다.
다시 한 번 선생님의 편하고 뭔가 기대고 싶은 어머니처럼 자상하신 성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날은 선생님께 지난 사연들을 고하고 감사의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아니 지금까지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굳이 지난 시절 일들을 들추어 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늘 먼저 안부 챙겨주시고 여러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고 계시기에 선생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베풂과 나눔이 일상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곧 비가 쏟아질듯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갑자기 뭔가 써보고 싶은 충동이 밀려온다. 하지만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배경은 있을지언정 그 시절 낭랑하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지만 선생님의 하늘같은 제자 사랑은 그리워진다. 먼저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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