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사냥에 이런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입구의 항아리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 같은 과일을 넣어둡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와서 그 곳에 손을 집어넣어 먹이를 꼭 잡고는 손을 빼지 못해서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스갯소리 같지만 손에 잡고 있는 하잘 것 없는 먹이를 놓지 못해 잡히는 원숭이에게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원숭이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언가를-분명히 그것은 하잘 것 없는 것임에 틀림없는데-놓지 못해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상실한 채 부자유스러움의 고통 속에 매여 있곤 합니다.
면담실에서 만나는 많은 환자들, 그 환자들이 거울이 되어 문득 그런 굴레가 내게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놓지 못해 꼭 쥐고 있는 그것, 중요한 것 같지만 결국 하찮은 것인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자긍심이 부족해 잘 손상되는 자존심 문제일까, 다른 사람에게서 기대하는 칭찬과 인정일까, 아니면 물질에 대한 욕심, 사회적 지위, 상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좁은 소견일까, 움켜잡고 있는 것을 놓아 버리면 자유의 몸인데 무엇이 그리도 중요하다고 어리석은 원숭이처럼 끙끙거리고 있을까….”
유명한 성 어그스틴은 인생을 깨닫고 난 뒤세상 만물을 ‘활용할 대상’과 ‘참 만족을 주는 대상’으로 구분하여 얘기했습니다. 활용해야 할 대상을 마치 참 만족의 대상인 양 혼동하는 데서 인생의 고통과 좌절이 온다고 했습니다. 참 만족을 주는 궁극의 대상을 ‘진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철학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진리가 무엇입니까?” 교수는 데카르트가 말한 진리, 칸트가 말한 진리 등을 이론적으로 잘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교수님, 그런 진리 말고 내가 그것을 위해 살 수도 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요즘 무척이나 혼란스런 사회를 보며 가치관의 혼돈, 바른 사회 윤리의 상실을 통감하게 됩니다. 하찮은 그것이 진리인양 놓지 못해 아등바등 하면서 막상 삶의 참 목표는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표류하는 우리 모두가 부디 만물의 영장다운 지혜를 발휘하여 잡고 있는 것들의 덧없음을 깨닫고 손을 놓고 자유하며 참 만족을 줄 수 있는 참된 가치를 추구할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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