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감으려고 물을 적셨다. 그런데 이게 샴푸병인지 린스병인지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다. 한 쪽 눈을 지그시 감고 요리 보고 조리 보고 뒤집어 봐도 도무지 글씨가 보이질 않는다. 눈에 물은 들어갔지, 출근 시간은 바쁘지, 이걸 어쩜 좋은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손에 짜보면 알겠지. 머리를 급하게 말리고 화장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스킨병인지 로션병인지 또 헷갈린다. 병을 치켜 올렸다가 눈 가까이에 대보았다가 글자 하나라도 찾으려고 했는데 눈이 얼마나 아파 오는지 모르겠다. 그냥 발라보면 알겠지 하고 넘어간다.
어제는 남편이 문자를 보는데 이마를 찌푸리고 손을 최대한 멀리하여 핸드폰을 본다. 아, 이 사람도 나처럼 눈이 나빠지기 시작했구나 싶었는데 눈이 아프고 따갑다고 호소를 한다. “여보, 당장 안경점에 가보세요. 유치원 애들도 안경을 끼는데 어때서요” 라고 쉽게 말은 했지만 사실은 그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 노안임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니 서글픈 일이지 뭐겠는가.
눈!!! 어릴 땐 멋으로 안경을 쓴 적도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선배가 돋보기를 끼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유, 할머니 다됐네’ 했었다. 친정엄마 생각이 난다. 바느질을 하시려면 몇 번이고 실 끝에 침을 발라 바늘 끝을 최대한 멀리하여 실을 끼우려고 공을 들이셨다. 그게 바로 딱 지금의 내 모습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건 바로 눈감아 주는 일 같다. 그걸 몰랐다. 자녀들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기보단 슬쩍 모른 체 해 주는 일 같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 대충 웃어넘기라고 자연스레 시력이 나빠지나 보다. 만약 시력이 1.5, 1.5가 계속 된다면 내 얼굴에 잡티나 주름까지 다 보이니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그러니 가까이 보지 말고 멀리 보라고 눈이 말을 해 주는 것이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가을바람이 물씬 느껴진다. 그렇다. 항상 여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낙엽이 물드는 가을이 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조금만 더 더워라. 가지 말아라. 여름아, 벌써 가니 붙잡고 싶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는 것을 가슴 쏴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비로소 눈은 마음의 창임을 새삼 느낀다. 그냥 보이는 것만 보고 그 속까지 볼 줄 모른다면 까막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서 곧 바로 좋은 점을 찾아 낼 수 있다면 그 만큼 밝은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 일 터이니 말이다.
세상에는 항상 좋은 것만 찾으려는 사람도 있고 나쁜 점만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마음의 눈을 밝히는 시간이 온 것 같다. 자칫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겉만 늙었지 속은 무르익지 못하는 어른들이 있으니 참 부끄러울 때도 있는 것 같다.
성철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견성(見性)이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뭐냐 하면 자성(自性)을 보는 것이다.”
이제 가을이 온다는 것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인 것 같다. 부처님을 자세히 보면 눈과 눈 사이 미간에 보석이 하나 박혀 있는데 그것이 제3의 눈을 뜻한다. 사사건건 밖으로 보이는 것을 시비하기보다는 그것을 초월하는 눈이 라고나 할까? 자기 내면을 조용히 바라다보는 눈인데, 평소에는 잊고 사는 것 같다. 그 동안 왜 그걸 몰랐을까. 생각해보니 시력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래서 오늘도 배운다. 좀 어슴푸레 보여야 내 흉도 덜 보이고 남의 흉도 덜 보이지 않겠는가. 밖을 보기보다는 안을 들여다보고 그저 두루뭉실 그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 남의 일 자세히 들여다보면 뭐 하겠는가.
앗! 출근 시간이다. 어제 메모한 걸 찾으려하니 또 눈이 캄캄하다. 안경이 어디 갔나. 아~ 여기 있었네. 그래 친구야! 항상 내 곁에 있어다오. 그러나 미안하지만 네가 필요할 때만 찾을게. 그래도 되겠니? 고맙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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