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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김천신문 |
친정이 추풍령이었던 어머니는 친정 갈 때에 꼭 김천역을 경유하셨다. 곡식자루를 머리에 이고 5리를 걸어 경북선을 타고 김천역에 내려, 다시 추풍령 가는 열차를 기다리셨다. 기차는 잘 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골에서 김천 나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영광이었다. 더구나 김천역에서 증기기관차를 타보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우리 형제는 아버지가 농사지으신 곡식들 보따리와 함께 김천역에서 추풍령 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이윽고 거대한 피스톤 동력의 큰 바퀴를 앞세워 김천역 플랫폼에 당도하는 문명의 이기, 증기기관차는 신기하다 못해 놀라웠다. 요란한 피스톤 동력의 소음과 함께 거친 구름떼 같은 증기를 몰아쉬며 기관차는 우리를 맞는다. 어린 동생은 놀라, 무서워 달아난다. 어머니와 나는 동생을 따라잡아 감싸며 달래야 했다. 1950~60년대 김천역 플랫폼에서 일어나는 광경이다.
그 당시 김천서 대구 가기에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케이티엑스(KTX)로 서울 가는 데에 그 정도의 시간이 채 안 걸린다. 2013년 전국 지자체 주민행복도 조사에서 김천이 최상위권에 속한다는 평가 결과가 알려졌다. 김천이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케이티엑스 김천(구미)역과 4개의 고속도로 나들목이 평가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육로 교통의 편의성은 김천의 위상을 크게 높여 주고 있다.
케이티엑스(KTX) 김천(구미)역에서는 화장실에 김천역 소개 홍보문을 게시하고 있다. 김천역의 역사와 중요성을 홍보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를 읽을 때마다 석연찮음을 느낀다. 김천역이 조선 세종 때에 번성한 것만을 강조하고 있어, 홍보문 내용이 턱없이 허술하거니와 게시 장소가 하필이면 왜 화장실이어야 하는지 의문이 일기 때문이다.
김천역(金泉驛)은 언제 생겼을까. 역사에 의하면 김천의 옛 이름인 김산(金山)은 통일신라경덕왕 때에, 김천이란 지명은 고려 때부터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김천역은 고려의 정사인 ‘고려사’에 가장 먼저 나온다. 이 책의 병지(兵志;군사 행정 기록) 역참조에 김천역을 소개하고 있다. ‘역참(驛站)’은 말(馬)을 마련하여 관리의 왕래와 공문서 수송을 담당하는 ‘역(驛)’과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는 ‘참(站)’을 합친 말이다. 그 당시엔 말(馬)이 주요 교통수단이었음은 물론이다.
원래 역 또는 역참이라 불리는 곳은 고려 때 군(郡) · 현(縣) 이외에 특수하게 다루어지던 지방행정 단위였다. 곧 국가의 직속지나 조세에 해당하는 생산물, 왕실과 사찰에 귀속된 경작물, 농수산물 등을 생산하여 나라에 바치는 작업을 하는 주민들의 영역이었다. 관리의 왕래를 돕고 공문서와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통신기관이기도 하였다. 김산현이 고려 초기 현종 9년(1018) 경산부(京山府:오늘날의 성주)에 귀속되면서(‘조선환여승람’) 김천역(김산), 추풍역(어모), 부상역(개령), 작내역(지례), 장곡역(지례) 등 5개 역이 생겼다. 조선 세종 때에 김천도(金泉道)가 개설되어 김천역은 관내에 17개의 역을 거느리게 되었다. 세조 때에는 경남 합천 지역의 역까지 포함하여 21개역을 관할하는 큰 역이 되었다.
당시 김천역은 김천 남산공원과 김천초등학교 부근의 남산성결교회쯤이었다. 역에 종사하는 사람이 1,160여 명이었다고 하니(‘김천역지’)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김천역으로 인하여 김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 국내 5대장에 들었음은 잘 알려진 역사이다. 조선후기 소설‘장끼전’에 김천장이 나오고, 대하소설‘객주’(김주영)에 김천의 방짜유기가 명물로써 전국의 유명 시장에 유통된다고 소개되어 있다.
21세기에 들어 김천~거제 간 남부내륙철도 건설을 거론하고 있다. 김천역의 역할에 날개를 달고 있는 느낌이다. 1,000년의 역사를 지닌 김천역이 이제 한반도 남부내륙지방 교통에 은빛 날개를 펼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