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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김천신문 |
불금이다. 불타는 금요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불금이면 뭐하나! 주부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올 수 밖에.
후다닥 저녁을 먹고 나자 남편은 운동가고 아이는 학원가고 나밖에 남지 않았다. 라디오를 켜고 잠시 식탁에 앉는다. 그냥 일찍 씻고 잠이나 잘까, 아니 책이라도 볼까. 에라, 나도 어디론가 나가보자. 그냥 창 넓은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차라도 한잔 하는 거지 뭐!
무작정 시동을 걸었다. 부~웅! 그러나 도착한 곳은 5분 거리에 있는 내 직장. 이런! 마르고 닳도록 손때 묻은 일터 뭐 그리 보고 싶다고 또 왔을까. 아마 토 일 비워둬야 하니 한 바퀴 돌아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다. 주차를 하다 말고 차를 돌린다. 빙빙빙 어두운 거리를 몇 바퀴 돌 다 가로등 아래 깜빡이를 켜고 차를 세운다. 어디라도 전화를 해야지. 핸드폰을 뒤적인다.
누구한테 할까. 으음, 이 사람은 좀 그렇고. 음, 이 사람도 좀 그렇고. 그러다 보니 오백여명 중에 전화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씁쓸했다. 여태껏 헛살았구나 싶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카페 근처로 차를 몰았다. 창밖에서라도 기웃거리고 싶었다. 내릴까 말까! 아, 혼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결국 집으로 돌아와 주차를 하였다. 시동을 끄고 의자에 기대어 한참을 망설이다 남편한테 전화를 건다.
“여보, 오늘따라 왠지 방황하고 싶네. 전화 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고.”
남편은 운동하다말고 쏜살같이 와주었다.
어떤 이가 그랬다지. 힘들 때마다 지갑 속에 있는 남편 사진을 꺼내 보았다고. 이사람하고도 내가 맞춰가며 살고 있는데 세상 그 무엇이 두렵겠냐고.
하하! 요즘 나도 그런 생각을 사실 좀 하긴 했었다. 그런 남편과 어슴푸레한 연화지를 서너 바퀴 돈 것 같다. 얼마만인가. 남편이 내 손을 꼭 잡는다. 옛날만큼 찌릿찌릿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테라스가 있는 창 넓은 찻집에 마주 앉았다. 커피향이 들어있는 더치 맥주를 시켰다. 우린 참 오랜만이라고 말했다. 만날 보는 한 집 사람이건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어요?”
남편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백열등에 비친 눈가가 촉촉한 것 같기도 했다.
“그야 당신 처음 만났을 때지. 이 여자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줘야겠다고 다짐했던 그 순간이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같아. 그런데 요즘은 당신 마음고생 시켜서 미안해.”
카페주인이 서비스 쿠키를 가지고 왔다.
“여보,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 노래 알아?”
“뭐 그런 거지 뭐. 누구나 소설책 한권씩 쓰는 게 아닐까?”
커피향이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달관한 사람처럼 내가 말했다. 조명아래 자세히 보니 내 남편이 아니라 한 남자였다. 저 사람도 참 많이 힘들겠구나.
카페 문을 열고 나오는데 벚꽃 나무가 벌써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잎새가 붉은 노을처럼 떨어지는구나.
아참! 어제 아이가 체험보고서를 썼는데 옆에서 보니 이렇게 썼다.
“오백년 된 느티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사람은 백년도 못사는데 나무는 오백년 살았네.”
저 나뭇잎처럼 백년도 못 살고 떨어질 몸. 우린 어찌 그리 아파하고 성내고 걱정한단 말인가! 산다는 게 원래 다 그럴 진데…….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귀뚜라미 소리가 온통 달빛을 채운다.
아이는 컴퓨터를 하다말고 후다닥 책을 편다.
거울을 보니 내 얼굴도 단풍이 들었다.
그래,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