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i김천신문 |
우리나라의 문화재 15만점 정도가 해외로 반출되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박병선 박사의 끈질긴 노력 끝에 되찾은 외규장각, 혜문 스님의 환지본처(還地本處) 정신으로 43개의 문화재가 제자리를 찾은 사례는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문화재가 제자리를 떠나있는 것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면 오봉리에 있던 국보99호 갈항사지 3층 석탑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천에 있었더라면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가치 있는 관광자원이 되었을 소중한 문화재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탑은 신라불교문화가 전성기에 달했던 경덕왕17년(785년), 석가탑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어 김천지역 화엄사찰의 중심으로 금오산 일대 수많은 암자를 거느리며 천년의 풍상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일본인 사학자들에 의해 동탑 기단부에 탑의 조성경위와 시기를 기록한 이두문자가 발견되어 금석학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자 수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일제는 1916년 도굴로부터의 보호를 빌미로 쌍탑을 경복궁내의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기고 광복 직전에는 일본으로 반출하려 인천부두까지 가져갔으나 실패하고 다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서울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갈항사지 삼층석탑이 당한 이 모든 수난은 김천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졌다. 고향을 떠난 쌍탑은 과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까? 야외 전시장 한 구석에 있어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관람객들을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국내 탑 가운데 명문(名文)이 새겨진 유일한 탑이라는 가치를 무색하리만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 탑이 있었던 갈항사 터 기념비가 있는 곳은 풀들이 무릎까지 올라올 만큼 무성하며 아름다운 석탑을 잃은 우리역사의 비정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다. 성의여고는 문화재청 주관의 2014년 문화유산교육 창의체험학교로 선정되어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역 문화재 사랑과 보호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 김천 애향심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  | | ⓒ i김천신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