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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5주년 기념기획시리즈

우리 고장 어제와 오늘 <1> 아포읍(牙浦邑) 편
인의예지(仁義禮智), 이사경의 꿈이 살아 숨 쉬는 충절의 고장
혁신도시와 구미시 잇는 교통의 요충지 장점 살려 새롭게 도약

권숙월 기자 / siinsw@hanmail.net입력 : 2015년 01월 15일

2015년 새해 창간 25주년을 맞은 김천신문에서는 기획시리즈 ‘우리 고장 어제와 오늘’을 연재하게 됐다. 각 읍면동 역사의 현장을 취재해 21회에 걸쳐 격주로 보도하게 될 기획시리즈는 그 지역의 역사, 유래, 전설, 특징 등을 알아보고 문화재, 유적지, 역사적인 인물(생존인물은 제외)과 교육시설, 특산물, 자랑거리 등을 소개하게 된다. 김천에 대한 애향심과 함께 자긍심을 고취시켜줄 ‘우리 고장 어제와 오늘’에 많은 관심과 협조를 바란다. <편집자 주>  


 
ⓒ i김천신문


아포읍은 김천시의 동북부에 위치해 동북쪽으로 구미시와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은 감천을 경계로 감문면, 개령면, 서남쪽으로는 남면과 접한다. 아포라는 지명은 삼한시대에 제석리 일대에 아포국이라는 소국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감천이라고 하는 큰 하천을 끼고 있어 예부터 배가 드나들었는데 그중 지금의 의리 공쌍마을 앞에 지역에서 가장 큰 포구가 있어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어금니 아(牙)자에 물가 포(浦)자를 써서 아포라 했다는 설도 있다. 동남쪽으로는 효자봉, 국사봉, 제석봉 등 높은 산이 감싸고 있고 감천이 동서쪽으로 흐르면서 하천변에 역들과 원창들, 포평들 등 862ha에 달하는 비옥한 평야지를 형성해 연간 4천800여톤에 달하는 쌀을 생산하는 지역 굴지의 곡창지를 형성했다. 아포와 관련한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삼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개령을 중심으로 성립됐던 감문국(甘文國)이 지금의 제석리 일대에 소국을 형성하고 있던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감천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는 구전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삼한시대에 아포일대에 아포국이라는 소국이 존재하면서 감문국과 연관을 맺으며 존속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서기 231년 신라의 공격으로 감문국과 함께 멸망하면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신라와 고려시대 말까지 감문주와 개령군으로 속했고 조선시대에 들면서 개령현 아포면과 동면으로 나뉘게 된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아포면과 동면을 합해 김천군 아포면으로 통합되고 1949년 금릉군 아포면을 거쳐 1995년 김천시 아포읍으로 승격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포는 고려 무신정권 때 대문장가인 서하(西河) 임춘(林椿)이 대신리 함골마을에 은거하며 가전체소설인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을 집필해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산실이 됐다.


또 고려가 망함을 한탄하며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예리 서당마로 낙향해 불사이군의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한 송월당(月堂) 이사경(李思敬)의 충절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마을과 전설


구현산 전설이 전하는 대신리(大新里)  
ⓒ i김천신문


대신리는 봉화산을 중심으로 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대동(함골/陷谷), 역전(驛前), 동신(東新/시내이) 세 마을로 이뤄졌다. 조선시대에 개령현 동면으로 속하다가 1914년 아포면으로 이관될 때 대동의 대(大)와 동신의 신(新)자를 따서 대신리라 했는데 뒤에 경부선 철로변에 대신역이 생기면서 역전마을이 새로 형성됐다. 마을 앞으로는 감천변에 역들을 비롯한 평야지가 펼쳐져있고 뒤로는 봉화산, 구현산, 덕산, 청룡산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을 형성하고 있다. 세 마을 중 중심마을인 대동(大洞)은 함골(陷谷)로도 불리는데 이와 관련한 풍수지리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이 전한다. 이 마을과 감천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개령면 동부리 감문산은 예부터 풍수지리로 볼 때 호랑이가 엎드려있는 와호형(臥虎形)의 길지로 그중 한 봉우리인 호두산이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하필 호두산이 맞은편 대신리 대동마을을 바라보고 있는지라 호랑이의 기세에 눌린 대동마을 사람들이 병을 앓거나 죽는 일이 잦아 모두들 큰 걱정을 했다. 어느 날 선산 태조산자락에 도리사를 짓던 도중 황악산에 직지사를 짓기 위해 선산에서 김천으로 가던 아도화상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는 감문산 호랑이의 기세를 꺾기위해 호랑이의 심장에 해당하는 자리에 절을 짓고 닭이 숲을 이룬 것처럼 많다는 뜻으로 닭 계(鷄)자에 수풀 림(林)자를 써서 계림사라 이름했다. 이후에도 변고가 끊이지 않자 아도화상은 봉화산 옆 한 봉우리를 개를 매달아놓았다는 뜻으로 개구(狗)자에 매달현(縣)자를 써서 구현산(狗縣山)으로 이름하고 대동마을을 빠질 함(陷)자를 써서 함골로 고쳐 호랑이가 매달아놓은 개를 보고 달려들다가 함정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부터 마을에 변고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이다. 또 함골마을은 고려 무신정권 때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서하 임춘(林椿)이 낙향해 살면서 우리나라 가전체 소설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국순전’과 ‘공방전’을 집필해 유명해졌는데 친구인 이인로(李仁老)가 술을 사들고 자신을 찾아오자 감사해하며 쓴 시조 한수가 전한다.


그대 날 찾아 산을 나서니


길에 쇠지팡이 끄는 소리


맑은 술 한골에 가지고오니


한잔술이 험한 산길을 바꾸었네


오랫동안 좋은일 없어 양웅처럼 살려했더니


뜻밖에 글을 나눌 니생원을 만났구려


오래도록 시골에 묻혀지내려고 했더니


어느 누가 중간에 도연명을 찾아왔는가


아포국과 길지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제석리(帝錫里)


제석리는 조선시대에 개령현 동면으로 속했던 동촌(東村), 남촌(南村), 진등(眞嶝) 세 마을로 이뤄졌는데 1914년 마을 뒷산인 제석봉의 이름을 따서 제석리로 고쳤다. 구전에 따르면 제석리 일대는 삼한시대에 감문국의 속국인 아포국이 있었는데 마을 뒷산인 제석봉(帝錫峰)의 임금제(帝), 관리봉(官吏峰)의 관리(官吏), 삼태봉(三胎峰)의 태(胎) 등이 모두 인근에 왕국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지명들이다.


ⓒ i김천신문


감천을 경계로 이웃한 감문국과의 주종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구전이 전하는데 “아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감문국에서 군사30인으로 하여금 정벌하려다가 감천물이 불어나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서기231년 신라에 의해 감문국이 정벌당할 때 아포국도 함께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제석리로 속하는 진등마을 뒤 경부선 철로변에는 길지(吉池)로 불리는 저수지가 있다. 1600년(선조33년) 이 마을 출신 길운절(吉雲節)이 정여립의 처남 소덕유와 함께 제주도에서 난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돼 아포가 속한 개령현이 폐현되고 길운절의 집터는 국법에 따라 헐리고 저수지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금계포란형의 명당, 금계마을을 품은 송천리(松川里)


ⓒ i김천신문


김천의 동쪽 끝으로 구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송천리는 숭산(崇山),금천(金川), 상송(上松), 하송(下松), 금계(金溪) 등 다섯 마을로 나눠져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송,하송의 송(松)자와 금천의 천(川)자를 따서 송천이라 했다. 국사봉자락으로 피난골로 불리는 금계마을 뒷산은 예부터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으로 불렸다. 이러한 형국에 자리를 잡은 금계마을은 닭이 편안하게 알을 품을 수 있도록 앞을 가리는 풍습이 있는데 이 마을에서도 300여년 전에 마을 앞 땅을 사서 소나무를 심고 조림을 해서 지금도 앞숲이라 불리는 인공숲이 일부 남아있다.


메추리가 굶어죽었다는 쌀꽂이 전설이 있는 인리(仁里) 


인리는 쌀꽂이(미곶/米串), 연실(蓮實), 연모산(연지산/蓮池山), 야동(冶洞), 봉명(鳳鳴), 황소(凰巢) 등 6개 마을로 나뉘어있다. 조선시대에 미곶리(米串里)로 불렸던 쌀꽂이마을은 옛날에 땅이 척박하고 물이 귀해 쌀을 꼬지에 꿸 정도로 가난했다 해서 쌀미(米)자에 꿸곶(串)자를 써서 미곶이라 했다고 전한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메추리 두 마리가 날아왔다가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지금은 관계시설이 완비돼 부촌이 됐다.연실마을 뒤 논 가운데는 큰 우물이 하나있는데 풍수지리로 볼 때 떠나가는 배의 형국인 행주형(行舟形)이기 때문에 마을 내에는 배에 구멍을 뚫게 되는 우물을 파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논에 공동우물을 파고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김천의 곡창지 원창들을 끼고 있는 의리(義里)  


의리는 김천지역 최대 곡창지중의 하나인 원창들과 이웃하고 있는 신촌(新村),공쌍(공雙)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원래 이 두 마을은 장수마을로 유명했는데 신촌마을에서 공쌍으로 이어지는 고개 명맥재로 신작로가 나고 공쌍마을에서 배시내로 넘어가는 장고개가 새로 나면서 궂은 일이 많이 생겨 마을 청년들이 장고개에 흙을 돋우는 공사를 한 후 이런 일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공쌍마을은 순창설씨와 현풍곽씨 두 집안에서 동시에 과거에 급제할 만치 인물이 많이 나와 쌍벽을 이룰만하다 해서 공쌍(共雙)이라 했는데 뒤에 공쌍(公雙)으로 바뀌었다.


이사경의 충절이 전하는 서당마가 있는 예리(禮里)  


예리로 속하는 구암(九岩), 지사(旨寺), 새터, 명례(明禮), 서당마는 구미시 고아읍과 경계를 이루는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아포면으로 속했다.그 중 서당마는 고려말 서북면병마부사를 지낸 송월당 이사경(李思敬)이 고려가 망함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다섯 아들을 데리고 낙향해 은거하면서 서당을 개설해 지역의 인재를 양성해 사당마라는 지명을 얻었다.이사경의 학문과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때 3백가구가 넘는 큰 마을을 이루었고 이때부터 아포가 학문과 예를 아는 명성을 얻어 서당마를 중심으로 인리, 의리, 예리, 지리와 명례(明禮) 마을이 생겼는데 이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따온 것이며 명례는 학문을 통해 예절이 밝아졌다는 뜻이다.훗날 후손들이 이사경을 추모하기 위해 일신서원(日新書院)을 세워 선생의 유지를 받들었다.


포평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지리(智里)


지리로 속하는 보신(甫新), 송변(松邊), 양산(梁山), 강호(江湖)마을은 조선시대 말까지 개령현 아포면으로 속하다가 1914년 지동으로 개편하고 1971년 모신, 송변이 집리, 양산, 강호가 지2리로 분동했다.감천변 비옥한 포평들 중앙에 자리 잡은 마을로 김해김씨와 동래정씨, 예천임씨 세 문중에서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도록 정기를 머금었다는 삼로암(三老岩)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한 개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양산마을과 강호마을 중간 효자막걸로 불리는 도로변에는 순창설씨 설광영(薛光永)의 비석이 섰는데 조선 정조 때 부모에게 지극한 효를 행하여 지역민들이 세워준 것으로 전해진다.


말바우로 유명한 봉산리(鳳山里) 


조선시대 말까지 개령현 동면으로 속했던 말바우(馬岩), 작동(鵲洞), 덕계(德溪) 세 마을이 1914년 봉산리가 됐다.말바우는 마을 뒷산에 말을 닮은 바위가 있어 예부터 주민들은 이 바위 앞에 제물을 차리고 제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고 이로부터 마을이름을 말바우라 했다.도로를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작동은 마을 뒷산인 까치산이 풍수지리로 볼 때 까치가 앉아있는 형국이라고 까치작(鵲)자를 써서 작동, 또는 까치골이라 했다. 까치산 너머에 있는 덕계는 감천과 연봉천이 합류되는 비옥한 평야지를 접하고 있는 풍요로운 마을로 두 하천의 덕을 입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덕계(德溪)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韓) 판서의 슬픈 전설이 전하는 국사리(國士里)


국사리는 아포읍의 읍소재지로 김천~구미간 지방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야(阿也), 역전(驛前), 칠산(七山), 교전(校前), 한못택지지구 등으로 이뤄져있다. 아야와 칠산은 조선시대에 개령현 동면으로 속했던 마을이고 역전과 교전은 경부선 철도 아포역과 아포초등학교, 아포중학교가 개교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국사라는 지명은 마을 남쪽에 있는 국사봉이라는 산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1914년 아야마을과 칠산마을을 통합할 때 김천군 아포면 국사동이라 했다. 아야라는 특이한 마을이름은 1650년 영월신씨 신득남이라는 사람이 강릉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살면서 들이 넓어 살기 좋다는 뜻으로 버금아(亞)자에 들야(野)자를 써서 아야(亞野)라 했는데 뒤에 한자가 아야(阿也)로 바뀌고 말았다. 신시가지인 한못택지지구는 1998년 한못 또는 대지(大池)로 불린 큰 저수지를 매립해 택지로 조성한 마을로 아파트와 상가, 주택이 들어서 신시가지가 조성됐다. 한못은 한씨(韓氏) 성을 가진 판서출신의 인물이 살던 집터였는데 아들 8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며 권세가 높아지자 주변에서 이를 시기해서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해 집안이 망하고 집터에 연못을 파 물을 채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대성저수지로 유명해진 대성리(大聖里)


ⓒ i김천신문


한티재 고개를 경계로 송천리 금계마을 너머에 위치한 대성리는 예부터 개령현 아포면과 김천군 아포면 대성동으로 속했지만 구미시와 인접해 구미시로 생활권을 형성해왔다. 회성(會聖), 대증(大增), 새터, 무장골, 자갈터 등 5개 마을로 이뤄졌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증의 대(大)와 회성의 성(聖)자를 따서 회성(大聖)이라 이름했다. 회성마을 입구에는 삼자암(三者岩)으로 불린 큰 바위가 있었는데 개령현, 인동현, 선산군의 수령들이 수시로 모여 회합을 했다고 붙은 이름이다. 성인 10여명은 올라설 수 있는 넓고 큰 바위였는데 수해 때 유실돼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다.직지사 말사인 불로사가 자리한 새터마을은 온천이 발견돼 유명해졌던 온수정마을이 폐동되면서 새로 형성된 마을로 인근에 경상북도 청소년수련원이 조성돼있다.부항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김천의 가장 큰 저수지였던 대성저수지는 1960년 자개라마을 일대 30여가구가를 이주시키고 축조됐다.


□아포의 산(山)


아포는 용문산으로부터 시작되어 황악산을 거쳐 초점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본류로부터 벗어나 있는 관계로 감천의 오른쪽 평야지에 입지해 상대적으로 산악지대가 적고 완만한 편이다.


제석봉(帝錫峰)


ⓒ i김천신문


산림이 상대적으로 적은 아포읍에서 가장 해발이 높고 험한 산으로 해발 512m이다. 달리 국사봉으로도 불리며 삼태봉, 관리봉, 왕비봉 등의 봉우리들이 연이어 제석리 일대를 감싸고 있다.백두대간에서 분기하여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수도지맥이 수도산에서 갈려 염속산과 글씨산, 빌무산, 고당산, 별미산, 백마산을 거쳐 금오산으로 갈 때 그 중 한 갈래가 다시 나뉘어 제석봉이 됐다.등산로가 개설돼 주말이면 많은 이들이 찾고 있으며 정상에 돌탑을 쌓는 한 노인의 일화가 SBS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소개돼 전국적인 명소가 되기도 했다.


봉화산(烽火山)


해발 340m로 제석봉과 이웃하고 있다. 혁신도시와 아포읍 대신리 마을 뒷산인 봉화산은 조선시대말까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불을 피웠던 봉수대가 있어 봉화산 또는 봉우재라 했다.산 정상에는 마지막 봉수잽이를 지낸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옛 봉수대터를 지키고 있다. 1950년대 말까지 인근마을에 살던 부녀자들이 타처로 시집을 갔다가 삼월 삼짓날마다 이곳에 모여 계추를 하며 회포를 풀었는데 남자들까지 가세하여 풍기가 문란해지자 사라지고 말았다.


□아포의 문화유산


ⓒ i김천신문


쌍비사(雙飛寺) 절터


대성리 회성마을의 제석봉 뒤편 지앙골에 있었던 쌍비사는 창건연대를 알 수 없는 고찰이 있었는데 1918년 순흥안씨 문중에서 재실을 신축하면서 법당건물을 매입해 가면서 폐사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후 방치돼있던 석불은 아포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2007년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전했다.


일신서원(日新書院) 터


아포읍 예리 서당마을에 있었던 서원으로 고려말 이곳으로 낙향해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한 송월당 이사경을 제향하기 위해 1781년 세운 서당이다.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방치되어 지금은 대나무밭으로 변했다.


□아포의 역사적인 인물


대신리 함골마을에 살았던 문장가 임춘(林椿)


고려 중기의 문인으로 예천임씨(醴泉林氏)의 시조이며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라 했다. 정확한 생몰연대를 알 수 없으나 문헌을 통해볼 때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중간(仲幹)과 상서(尙書)를 지낸 아버지 광비(光庇) 및 한림원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종비(宗庇)에 이르러 귀족가문이 되었고 일찍이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가 20세 무렵에 무신란을 만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공음전(공신에게 지급하던 토지)까지 탈취당하는 등 가문 전체가 화를 입어 겨우 목숨은 부지하고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아포 함골마을로 피신했다. 7년간 함골에 살면서 가전체소설인 ‘국순전 麴醇傳’, ‘공방전 孔方傳’ 등을 집필하며 당대의 비리를 비유적으로 비판했다. 다시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를 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30대 후반 요절하고 말았다. 임춘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유학자로서의 뜻을 지키며 불우했던 생애를 군자의 도로 지켜가고자 노력했다.


충절의 표상 서당마 이사경(李思敬)


고려 말 국운이 쇠하자 벼슬을 버리고 아포 예리 서당마로 은거한 문신이다. 전의(全義)이씨로 호는 송월당(送月堂). 할아버지는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언충(李彦冲)이며 아버지는 밀직부사 이광익(李光翊)이고 장인은 판서 백광비(白光庇)로 당시 명문가의 후예였다.1356년(공민왕 5)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를 지내고 뒤에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가 됐다. 1387년(우왕 13) 12월 명나라 조정은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요동(遼東)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결정하고 철령 일대와 해당 군민(軍民)을 개원(開原) 관할로 한다는 명 황제의 방을 붙였다. 이 일로 이사경은 강계로 유배를 가게되고 고려의 국운이 쇠약해지며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다섯 아들과 함께 서당마로 낙향해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다.조선 개국이후에도 방에 공민왕의 초상을 걸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예를 갖추는 등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다.


이색(李穡)이 지은 ‘송월당기(送月堂記)’가 남아 있다.


□아포의 자랑


ⓒ i김천신문


45년간 일기를 쓴 동신마을 권순덕씨


아포읍 대신리 동신(시내이)마을 권순덕(權純德, 72세)씨는 1969년부터 현재까지 45년간 한결 같이 일기를 써오고 있는 의지의 한국인이다.25세 되던 해인 1969년 1월1일부터 시작된 권순덕씨의 일기는 농사일과 결혼생활, 부모에 대한 병수발, 자녀교육, 이웃과 친구관계 등의 개인사를 비롯해서 당시에 일어났던 국내외의 중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진솔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2009년 김천시승격 60주년을 기념하는 김천기네스에 일기를 가장 오래 쓴 김천인으로 등재됐고 2014년에는 전북대학교에서 ‘농민 권순덕의 삶과 기록, 아포일기’라는 이름으로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권순덕씨는 “어렵게 살아왔지만 매일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반성하고 내일을 설계하며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내 일기를 통해서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이 꼭 일기를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포의 특산물


원기를 일깨우는 보약, 인삼(人蔘)


아포는 김천에서 과수재배면적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지만 이렇다 할 특산물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던 중 아포 일대의 토질이 무기질이 풍부한 붉은 찰흙으로 이뤄져있다는 점에 착안한 농민들이 십수년 전부터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해 연간 8톤의 인삼을 생산해 인삼불모지인 김천이 새로운 인삼 생산고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아포의 산업


아포농공단지


ⓒ i김천신문


과수와 쌀 중심이던 아포 산업에 획기적으로 변화를 가져온 것이 1999년 12월 인리 일대에 준공된 아포농공단지라 할 수 있다.총 87억원의 예산을 들여 19만㎥ 면적에 조성된 아포농공단지는 ㈜우림을 비롯한 20개 업체에서 650명의 근로자를 고용해 연간 500억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고 있어 아포읍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모다 아울렛


아포읍 송천리 산 31-1 일대에 경북 최초의 대규모 아울렛이 건립된다. 구미시와의 접경지역으로 구미, 김천은 물론 혁신도시 주민 모두에게 접근성이 높은 아울렛은 4만8천874㎡(1만5천평) 부지에 연면적이 2만1천125㎡에 이르는 대규모. 구미 교복단지 내 할인매장들과 인접하고 있어 시너지 효과가 예상되는 쇼핑 공간이 될 전망이다. 2013년 12월 기공식 이후 개발이 중단돼 아울렛 단지 조성이 물 건너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던 중 2014년 11월 모다 아울렛이 건설을 맡아 사업이 재개됐으며 오는 9월 준공예정으로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포의 학교


경북과학기술고등학교 1949년 2월 1일 아포고등공민학교로 설립돼 1951년 12월 27일 아포중학교로 개교했으며 1972년 12월 27일 아포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1973년 4월 30일 개교하면서 같은 교정 내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병설 운영했다. 1989년 9월 28일 교명을 아포종합고등학교로 변경한데 이어 2012년 3월 1일 경북과학기술고등학교로 변경했으며 지금까지 5천7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아포중학교 1949년 2월 1일 아포고등공민학교로 설립돼 1951년 11월 29일 6학급 인가를 받고 같은 해 12월 27일 아포중학교로 개교했으며 지금까지 9천4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아포초등학교 1924년 5월 13일 4년제 아포공립소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24년 11월 1일 개교했으며 1935년 4월 1일 6년제로 승격됐다. 지금까지 7천7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대신초등학교 1943년 4월 28일 대신국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43년 5월 6일에 개교했으며 지금까지 4천1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권숙월 편집국장>


 

권숙월 기자 / siinsw@hanmail.net입력 : 2015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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