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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김천신문 |
천만이 넘는 관객들이 영화 ‘국제시장’을 봤다는 소식을 접한 다음부터 줄곧 조바심이 났다. 같이 영화관에 갈 만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거의 대부분 영화를 본 후였다. 그러던 중 같이 보자는 이웃을 만나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다. 흥남부두에서 주인공 덕수가 어린 동생의 손을 놓치던 순간에도 울었고 어린 딸을 찾으러 사지로 되돌아가던 아버지가 덕수를 붙들고 “이제부터는 네가 가장이다. 어머니, 동생은 네가 지켜야 한다”라고 당부했을 때도 울었다. 독일에서 덕수가 탄광 안에 갇혀 죽어가면서 “영자 씨”를 애타게 찾을 때도, 헤어졌던 여동생과 수십 년 만에 재회했을 때도 울었다. 무엇보다도 노인이 된 덕수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오열할 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아버지, 저 약속 다 지켰습니다. 저 잘했지요? 하지만 저,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버지!”
덕수는 참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가족들을 지켜내기 위해 늘 시대의 가장 앞줄에 서야만 했다. 하고 싶은 일들과 이루고 싶은 꿈들을 가슴속에 묻어두느라 늘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만 했다. 덕수가 괴팍하고 완고한 노인이 되어버린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감동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남아있던 어느 주말 나는 산악회 사람들과 부산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우리는 태종대의 둘레길을 일주한 후 국제시장으로 이동했다. 영화의 배경이 된 국제시장과 꽃분이네를 보러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하지만 산악회 사람들이 꽃분이네에 다녀올 동안 나는 길 건너 자갈치 시장에 다녀와야 했다. 부산에 가게 되면 꼭 건어물들을 사리라고 예전부터 별렀던 참인지라 아쉽지만 꽃분이네 구경은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남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은 기념사진을 살펴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러움과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우연히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꽃분이네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 때문에 꽃분이네는 물론이고 이웃 상인들마저 영업에 큰 지장을 받고 있다는 뉴스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도 며칠 전에는 화면에 나오는 저 공간에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문득 ‘우리들은 얼마나 철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꽃분이네가 겪고 있는 저 곤경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정신적인 가난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민망한 소동이라는 생각 말이다. 만약에 덕수가 실존인물이어서 실제로 꽃분이네를 지키고 있었더라면 그 영감 성깔로 봐서는 아마도 가게 앞에 몰려든 우리들에게 이렇게 일갈했을지도 모른다.
“썩 꺼져라, 마! 나는 늬들 구경거리가 아니데이. 집에 가서 너그들 삶이나 똑바로 살아라.”
며칠 전 라디오에서 우연히 노래 한 곡을 들었다. 서유석의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노래였다. 따스한 통기타의 선율 위로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아이처럼”이라는 가사가 흘러나오자 어쩐 일인지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나의 마음을 장난감처럼 너무나 가볍게 다룬다는 원망과 푸념을 담은 노래를 서유석은 특유의 중저음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부르고 있었다.
감동에 젖어 노래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꽃분이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꽃분이네가 좋아서 꽃분이네 앞으로 모여들었던 철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에도 음악은 계속되어 서유석의 노래는 어느덧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돌보지 않는 나의 여인아, 나의 사람아, 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그렇다. 우리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다만 우리들은 소중한 것들을 소중하게 다루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지난 시간들은 폭풍우의 시간이었고 우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으니까. 하지만 폭풍우는 지나갔고 이제 우리에겐 여유가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소중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되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