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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 미술관은 보는 이를 무참히 왜소하게 만든다.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 미술관의 위엄 때문이다. 6개의 건물이 내부로 연결돼 모두 1,056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는데, 연장길이가 총 27km라 한다. 평소 교과서에서나 봐 오던 레오나르드 다빈치, 라파엘로, 모네, 밀레, 르누아르, 고흐, 고갱, 피카소의 걸작들이 관람객을 감격케 한다. 제정러시아 시대 에카테리나 여제가 유럽 나라들의 문화적 우월감에 대적하여 건립하게 됐다고 한다.
이 미술관의 프랑스미술품 전시실을 거쳐, 어느 방에 이르니 우리나라 김흥수 화가의 “승무”가 걸려 있다. 우리 춤사위의 뿌리침과 솟구침 사이의 묘한 긴장감 앞에서 한국사람들은 소리없는 만세를 부르게 된다. 김흥수 화백이 한국의 피카소로 불린다는 사실도 거기서 알게 되었다.
남정(藍丁) 박노수가 18세 때에 청전(靑田) 이상범 별채 화실에서 습작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청전이 제당(齊堂) 배렴(裵濂)을 데리고 나타났다. 제당은 남정이 그린 그림을 자세히 보고는 처음 그리는 것으로는 ‘보통 재능이 아니다’라고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다. 남정과 제당의 첫 만남이었다. 그 때 제당의 나이 35~36세 쯤, 남정과 제당은 함께 청전에게 사사(私事)했다.
제당은 어떤 화가인가. 제당은 선전(鮮展; 조선서화협회전)에 9회부터 15년 동안 입선 및 특선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전(國展;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2회부터 16회까지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오로지 수묵산수화에 집착, 탐닉하면서 1951년 진해 이충무공동상 제작 땐 사정위원, 1954년 43세에 대한민국예술원회원이 되었다, 서울대 강사, 홍익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한국미술사에서는 현대한국화의 계보를 심전 (心田) 안중식 ·소림(小林) 조석진을 제1대, 청전(靑田)이상범·소정(小亭) 변관식·이당(以堂) 김은호를 제2대, 제당 배렴·월전(月田) 장우성· 운보(雲甫) 김기창을 제3대로 보고 있는 듯하다. 저명한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제당을, 재기보다는 꾸준한 노력과 자기 예술을 추진한 중거리형 천재로 평한다. 중거리형이란 제당이 57세로 단명하였음을 가리킨 듯하다. 한결같이 자연에 애착, 오히려 자연에 몸을 맡기고 그 속에서 삶의 보람을 마음껏 맛보는 자연인으로, 주지적이며 정적인 작가로 평한다(제당 배렴화집).
배렴과 목랑(木郞) 최근배(崔根培)는 일제강점기 김천화단에 새 바람을 일으킨 화가들이다. 배렴은 1911년 김천 조마면 신안리(죽정)에서 태어나 금릉청년학관 중등과를 수료하고 외조부를 따라 상경하여 청전에게 사사, 수묵산수화로 대성하여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전통과 맥을 이어 온 인물이다. 청와대와 국회의장 공관에 그의 작품이 걸려있다고 전한다. 고려대 박물관과 동아일보사옥에서 그의 그림 대작을 본적이 있다. 교과서에도 그의 그림이 실려 전한다. 1978년 제당 서거 10주기를 맞아 동아일보 ·동아방송 주최로 서울에서 “제당 배렴회고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이 때 이경성은 “인간 배렴은 죽어도 예술가 배렴은 죽지 않았다”고 했다.
제당이 말년을 보낸 서울 계동의 가옥은 지금 서울시 SH공사가 매입하여 한옥체험 게스트하우스로 쓰고 있다. 산발적으로 제당의 유작들이 나돌고 있는 그의 고향 김천에서는 뭘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