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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오 하는 이 노래는 누가 지었어요?”
“내가 지었소이다. 나는 국경 회령이 내 고향인 것만치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 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를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랫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하여 내어서 가사를 짓고……”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1937년 1월 잡지 ‘삼천리’에서 그는 밝혔다. 1918년에는 간도(間島)로 넘어가 명동학교에 다니다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아다녔다. 북간도에서 어렵게 지낼 때 독립투사 이춘성(李春成)을 만나 춘사(春史)라는 호를 받았다. 먹고 살기 위해 러시아 백군에 입대, 용병생활까지 했다.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중동학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며 영화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1926년 10월 자신이 원작, 각색, 감독, 주연하여 영화 ‘아리랑’을 단성사에서 개봉시켰다. 함북 회령 국경지대에서 자라 항일투쟁을 하다가 중국․러시아․일본의 문화까지 접한 그는 한국 영화의 선구자 나운규(羅雲奎)이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 노랫말 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고정부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형성되었다. 영화 ‘아리랑’은 영상 미디어의 속성과 함께 근대민요 ‘아리랑’을 우리 민중에 인식시키는 데 큰 충격파역할을 하였다. 2016년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지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연작 3편으로 된 이 영화에서 가수 김연실, 이경설, 이정숙, 유경이 등이 ‘아리랑’을 부르다 1932년에 김연실이 음반에 담아내었다. 유행가 ‘아리랑’을 맨 처음으로 음반에 담아낸 가수는 1930년 1월 콜럼비아레코드에서의 채동원(채규엽)이다. 이래 왕수복, 이애리수, 김용환 등도 음반으로 냈다. 민족정서의 노래들이 음반을 타고 전파되자 급기야 1933년 8월엔 조선총독부가 이런 노래들을 대상으로 금창령(禁唱令)을 내렸다. 낙인효과라 할까. 1937년 8월 9일 36세로 요절한 나운규의 장례에는 장송곡으로 울려 퍼졌다. 급기야 금창이 안 되니 일제는 오히려 우리 ‘아리랑’의 일본화로 조선인의 응집력과 정서를 희석시키려고 했다.
‘아리랑’은 수많은 국악인과 가요작가들이 만들어 보급했다. 작곡가 나화랑이 만든 아리랑계 음악만 41곡이 있다. 이 중 무형문화재 이은주가 부른 ‘아리랑타령’은 국악계에서도 기념비적인 음악으로 평가 받는다. 요즘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나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부르는 ‘아리랑’은 21세기 버전이라 할까.
우리 민족의 정서와 혼을 대표하는 노래 ‘아리랑’의 기원은 언제일까. 근대의 고종 조 경복궁 중창 때(1865~1872)로 보는 주장과 고대 또는 조선 조로 보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문헌상 아리랑 노래와 가장 유사한 말씨는 이승훈이 1790년에 지은 ‘만천유고’에 처음 나타난다. 이 책의 ‘농부사’에 ‘아로롱’이란 어사가 들어 있다. 1894년 5월에 기록한 황현의 ‘매천야록’에 ‘아리랑 타령 阿里嫏 打令’이 당시 궁중의 상층 지도층이 꽤나 좋아한 노래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5월 동학혁명을 취재하러 온 일본 우정국 ‘우편보지신문’ 에 ‘아리랑’이 취재되어 보도되었다. 또 1896년 미국인 초청교사 H. B. 헐버트의 ‘조선유기’에 ‘아르랑’이라 채보, 서양식 악보로 남긴 것이 1985년 발굴되어 근대민요 ‘아리랑’ 소개의 중요한 기록물이 되고 있다.
아리랑은 그 분포상 강원도지역의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경기지역의 ‘긴 아리랑’ ‘자진 아리랑’, 경상도 지역의 ‘밀양아리랑’, 전라도 지역의 ‘진도 아리랑’을 우리나라 대표 아리랑으로 꼽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지난해, 그 동안 모르고 지냈던 ‘김천 아리랑’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곡을 살려 ‘김천 아리랑’을 복원해야 한다. 지난 12월엔 음악과 춤과 극이 어우러진 ‘감문 아리랑’도 출현했다. 좀 더 스토리텔링을 보태면 한 편의 뮤지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한민족의 대표곡 ‘아리랑’은 문학․연극․드라마․무용․영화․오페라․만화․상품명․한시․뮤지컬․서예에 이르기까지 멀티유즈 문화콘텐츠가 되고 있다. 융합 문화를 형성하며 통섭을 앞당겨 실천하고 있다. 아리랑이 갈수록 문화콘텐츠 사업의 중심부에서 다채로운 빛을 발할 것이다. 조급하고 과잉된 아리랑 열기는 염려스러우며, 소중한 토속 아리랑을 묵히는 것도 몽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