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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경북 신도청은 왜 안동으로 갔을까?

김용대
(변호사, 한국자유총연맹김천시지회장, 경상북도공직자윤리위원장)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16년 06월 15일
ⓒ 김천신문
금년 봄 경북 도청이 대구에서 안동으로 옮겨갔다. 지난 주 토요일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모임 회원 40여명과 함께 안동에 있는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서애 류성룡의 후손이 살았던 충효당(하회마을), 학봉 김성일의 종택 등을 다녀왔다.
신도청 현관에 “경북은 한국정신의 창”이라는 글씨가 쓰인 큰 액자가 걸려있다. 신라의 화랑정신, 조선의 선비정신, 호국정신 등은 경북의 핵심 가치이자 자부심일 것이다. 그런데 왜 신도청이 안동으로 갔을까?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단연 퇴계를 꼽을 것이다. 그는 여러 차례 왕이 내린 벼슬을 사양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의 뜻이 높고 깨끗하여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고 일찍이 “너의 벼슬은 한 고을 현감 직이 마땅하니 높은 관리가 되지 마라”고 말했다. 퇴계는 늙어서까지 어머니의 말을 따르고자 했다.
퇴계는 61세에 도산서당(陶山書堂, 훗날 도산서원)을 짓고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퇴계는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했고 학봉, 서애 등 260여명이 그 학풍을 따랐다.

퇴계의 수제자 학봉은 동인에서 분파된 남인이었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사육신의 복권을 주장하는 등 ‘대궐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1591년 조선통신사 부사로서 당파적 관점에서 선조에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 보고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학봉은 임란 후에는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서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진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병사했다. 남인의 반대편인 서인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도 김성일의 강직함과 절개는 높이 평가되어 있다.

서애는 22세에 퇴계의 제자가 되었고 학봉과 동문수학했다. 퇴계는 서애를 보고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극찬했고 학봉은 4살 아래인 서애를 부러워했다. 정조(正祖)는 서애를 “참으로 우리나라의 유후(留侯)”라고 평했다. 유후는 BC 202년에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장량이 나라를 건국하는데 기여하였다면 류성룡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정조는 서애를 장량에 비유했을 것이다.

서애는 임진왜란 1년 전 좌의정으로서 종 6품 정읍현감 이순신을 7단계 뛰어넘은 정 3품 전라좌수사로 발탁해 전쟁에 대비했다. 만약 서애가 이순신을 등용하지 않았다면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서애는 서울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이순신과 함께 보냈고, 그들은 벗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서애가 선조에게 “이순신은 글을 잘 알지만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으로 대장(大將)이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애도 10대 후반에 관악산에서 과거 공부를 할 때 “얼굴빛은 부드러웠으나 말과 행동은 호걸 같았고 때때로 농담도 잘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애는 병법에도 능했다.

서애는 임진왜란 후인 1593년 10월에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전시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가진 자(양반)의 특권을 폐지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면천법, 작미법, 훈련도감, 속오군 등은 서애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이다.
면천법은 천민, 양민 모두 과거를 보도록 해 합격한 자는 등용하고 왜적의 머리를 베어온 자들도 노비신분을 면해 주는 법이다. 작미법은 종전의 조세의 단위를 가호에서 농지의 면적으로 변경하고 특산물 대신에 쌀로 통일하는 법이다. 그리고 양반도 군복무를 시키기 위하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양반과 백성들을 속오군으로 편성했다.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양반들은 저항했지만 백성들은 조정을 신뢰하고 의병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1598년 11월 19일 서애는 정치적인 반대편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같은 날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서애는 파직당한 후 하회마을 인근 허름한 초가집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훗날을 경계하기 위하여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그는 외로움을 이기고 스승 퇴계, 사형(師兄) 학봉, 그리고 벗 이순신 등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등 인격적으로도 완벽했다. 그는 백성들이 희생된 것을 자책했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가 66세에 사망했을 때 상(喪)을 치르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천재 류성룡은 그렇게 쓸쓸히 죽어갔던 것이다.

퇴계가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벼슬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도산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길렀기 때문에 경상도의 선비들이 안동으로 몰려들었다. 학봉은 강직한 인품으로 당파를 초월하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고 서애는 조선을 구한 1등 공신이었지만 그 자신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죽어서 조선 선비의 정신과 책임감을 우리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북 신도청이 이들의 혼을 찾아서 안동으로 간 것일까? 아니면 이들의 혼이 신도청을 안동으로 옮겨 가도록 한 것일까? 안동은 항일민족시인 이육사 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이것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16년 0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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