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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4대가 한 집에 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손자의 “왕할아버지”, “왕할머니”를 연호할 때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올봄 할아버지는 먼 나라로 소풍을가셨고 할머니는 병상에 계신지 벌써 일곱 달째다.
병상에 계신 증조할머니의 손을 잡고 “왕할머니, 힘내세요!”, “할 수 있어요, 파이팅!”을 외치는 네 살 증손자의 마음도 모르는 채 꺼져만 가는 할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진다.
추석 전날, 며느리는 제사가 많은 친정에 아들과 함께 보내고 혼자 추석준비를 한다. 추석음식과는 상관이 없는 기름진 명절음식 먹고 와서 입가심할 것만 장만한다.
통계피에 생강을 채썰어 삼베주머니에 넣어 끓이고 다시멸치 듬뿍 넣은 묵은지 김치찌개를 하며 어머님을 생각해 본다. 논에 물들어가는 것이며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가장 보기 좋다는 심정을 육십이 넘어서야 겨우 알 것 같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던 다시마가 싱크대 아래서 나오고 간장을 넣어야할지 소금을 넣어야할지 헷갈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무엇을 찾는지 한참을 들여다 보고 있는 나. 아침에 약은 먹었나?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른 그늘이 참 편했는데, 덜컥 겁이 난다.
시어른들의 저 많은 짐을 어떻게 다 처분할까? 장롱 세 개에 꽉 찬 옷이며 이불, 앞뒤 베란다 수납장에 가득 찬 살림살이, 모으기 좋아하는 어머님의 살림욕심에 각종 기름종류와 많은 튀김가루들, 엄청난 양의 고춧가루, 여러 가지 장아찌, 항아리마다 수북이 담겨있는 마른 나물 등등.
걱정을 안고 병원에 가본다. 누워계신 어머님의 모습 속에 이십 년 후의 내 모습이 보인다. 나의 손자와 아들이 나를 내려다본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온다. 아직까지 보내드릴 때가 아니야. 잘해드려야지. 내 자식이 보고 있잖은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야 죽는 것은 현실이니 받아들여야한다. 정말 부질없는 인생길이란 걸 매일매일 실감하며 살아간다.
비우자, 비우자, 마음도 비우고 가진 모든 물건들 필요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나누며 빨리빨리 비우는 연습을 해야겠다.
구순의 친정 어머니 살아계실 때 옷들을 모두 이웃에게 나눠주고 계절이 바뀌니 입힐 옷이 없더라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요만큼 핏기 있을 때 내 주위는 내가 정리해야겠다.
내년 추석을 볼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는 인생사. 어느 날 자는 잠에 죽는 행운(?)이 있기 전에는 병들어 죽어야 하니까 말이다.
수정과를 냉장고에 넣으며 아들 내외를 기다린다. 저들도 20~30년 후에는 오늘의 내가 되어 있겠지.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 것을. 욕심내봐야 소용없잖은가! 가지고 갈 것 하나 없는데……”
흥얼거리며 내가 좋아하는 성현의 말씀을 떠올린다.
“노각인생 만사비 우환여산 일사공(老覺人生 萬事非 憂患如山 一笑空 늙어 생각하니 만사가 아무것도 아니며 걱정이 태산 같으나 한번 소리쳐 웃으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