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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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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동 남산동 3·1운동
모든 세부 계획이 끝나고 10일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서둘렀다. 3월 10일 김충한과 김수길은 황금동교회에서 “금번 만국평화회의의 좋은 기회를 맞아 우리 조선은 독립할 운이 왔음을 고한다. 우리는 타국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돼 천부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기초했다.
그날 밤 남산동에 있는 최용수의 집에서 당시 금융기관인 김천저축계로부터 빌려온 등사판으로 경고문 300장을 등사했다. 또 주남태, 김원배는 종이 태극기 50여 본을 만들어 10일 상오 9시 황금동에 있는 한상태의 집으로 운반해서 김천공립보통학교(김천초등학교 전신) 학생 한정이, 석동준(김천시 용호동, 어물상, 20세), 학생 박희철 등에게 나눠 주면서 다음날 거사 장소에 많이 모이도록 했다.
석동준은 11일 이들로부터 받은 태극기 16본을 들고 김천공립보통학교로 가서 학생 김종호 등에게 나눠 주면서 오후 3시에 의거 장소에 참가하도록 다짐하고 한명수(황금동교회 조수, 27세)는 교동의 교회로 달려가 이곳에 사는 김재위(농업, 36세), 허학선 등에게 의거 장소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이러한 거사 준비가 주도면밀하게 끝나고 11일이 됐다. 정해진 시각 오후 3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경고문을 등사한 등사기를 저축계 사무실로 돌려보내는 사람의 뒤를 미행하던 경찰에게 등사 원고지가 발각돼 황금동교회에 모여 있던 주동인물 4명이 검거되고 말았다. 따라서 계획했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에 연루돼 많은 사람이 검거됐는데 재판에 회부돼 5월 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과 형량은 다음과 같다.
△김충한(金忠漢) 징역 2년 △김원배(金元培) 징역10개월 △최용수(崔龍洙) 징역 1년 6개월 △한명수(韓明洙) 징역 10개월 △주남태(周南泰) 징역 10개월 △김재위(金在緯) 징역 6개월
용두동 시위운동
1922년 3월 11일의 제1차 김천에서의 독립시위거사가 탄로나자 일본경찰의 경계는 더욱 삼엄해지고 무장한 기마헌병대가 동원되어 시가지를 누비면서 물샐틈없는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울분을 참지 못한 애국청년들이 있었다. 3월 24일 밤 11시에 김인수, 김윤상, 최응수, 김영훈 등이 감호동 조일영 집에 청년 20여명과 함께 모였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 4인은 즉시 경찰에 체포돼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각각 태형 90대씩의 언도됐다.
개령 시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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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령초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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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계기로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의 함성이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자 개령면 동부리 주민들은 3월 24일, 4월 3일, 4월 4일, 4월 6일 4차례에 걸쳐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벌였다.
제1차는 3월 24일로 이날 개령보통학교(개령동부초등학교) 졸업식인 동시에 학부모 은창서의 집 혼인 잔치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피로연 도중에 김태연(金泰淵.일명 金丹冶)의 주동으로 허철, 전종수, 최영돈 등은 전국 각지에서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고장에서는 이런 거사가 없는 것은 수치라 여겨져 거사하기로 합의하고 4시가 돼 피로연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일장의 연설을 하고 이들 4명이 선두에 서서 유동산으로 향해 행진하니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시위 대열에 참가해 시위대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조금 뒤 무장한 헌병 기마대가 달려와 선두를 가로막고 총을 쏘아 흩어졌는데 그 가운데 2명이 체포됐다.
이 일로 김태연, 허철, 전종수, 최영돈이 재판에 회부되어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태형 90대의 언도를 받았다.
제2차는 4월 3일로 동부동에 사는 문정환이 동료 2명과 마을 뒷산인 감문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불렀고 제3차는 4월 4일 문정환, 홍득린, 문학이 등이 같은 산에서 만세를 불렀다.
제4차는 4월 6일 밤에 동부동에 사는 머슴들이 역시 횃불을 들고 감문산에 올라 만세는 부르면서 시위를 했다. 이에 가담했던 김임천, 도동영, 김명길, 최가만, 정남준, 황도석, 이말용, 윤광어리, 김타관 등 9명이 검거돼 재판에서 90대의 태형 처벌을 받았다.
증산 시위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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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문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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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증산면에서도 거사계획이 있었다. 증산면소재지인 유성리 옥동에 있었던 쌍계사의 승려 이봉정, 김도운, 백성구 등이 협의해 4월 5일 밤에 평촌리 뒷산에서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날 낮 군중 동원을 위해 증산면 유성리 동장 최상철을 찾아가 이 계획을 알리면서 주민 동원을 부탁하고 또 평촌리 동장 김도원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면서 주민동원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거사 직전에 누설돼 주동 인물 가운데 이봉정, 김도원이 검거돼 재판에 회부되고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징역 10개월의 언도를 받았다.
김천지역 교회연합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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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면 유성리 옥동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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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지역 기독교와 천주교 신자들은 3월 20일 밤에 일제히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20일 밤 8시를 기하여 황악산에서 봉화를 올리면 이를 신호로 시내에서는 신도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시내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했다. 밤 8시에 과연 봉화가 올랐으나 시내에는 헌병과 경찰이 거리 뒷골목까지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어 신도들이 한 장소에는 모일 수가 없었고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만세 고창이 12시까지 계속됐으나 경찰에 검거되지는 않았다.
봉산면 상금리 만천봉(萬千峰) 만세시위운동
김천시 봉산면 상금리 마을 앞 만천봉에서도 인근마을의 남녀주민 수십명이 모여 대대적으로 벌인 만세시위운동이 있었다.
4월 1일 정오를 기하여 만천봉에서 인근 주민이 모이기로 하고 상금동 주민이근욱이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로 독립운동가 편강렬을 찾아가 숨겨오던 태극기 한 장을 얻어다가 동네 어른들이 후미진 사기점마을에 은신하면서 무명베에 태극기를 그리며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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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면평촌리장뜰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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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정오가 되자 동민들이 만천봉 정상에 모이기 시작했다. 동민 이덕필이 운동 취지를 말하고 동민 김병철이 일제의 야욕을 성토한데 이어 동학란에 가담한 바 있는 조도봉이 모아 놓은 청솔가지에 불을 붙이니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동민들은 고조된 감격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목이 쉬도록 처음 불러보는 만세 소리는 울음소리로 바뀌어 모두 부둥켜안고 봉화가 다 타도록 울부짖었다.
만천봉은 마을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을을 지켜주는 진산이요, 마음을 달래주는 영산이다. 종묘사직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 마을 선비들은 이 산에 올라 망곡해온 곳이다. 1895년 10월에는 국모가 시해됐을 때 이 산에 올라 북향재배로 조문을 읽어 제례하고 1896년 단발령이 내리자 김병태는 이 산에서 항거를 맹세하고 삭발 감시반을 조직해 사기점에는 정기일, 금화마을에는 윤성동, 상리에는 김병식, 중리에는 김진구가 각각 감시했는데 삭발한 다른 마을 사람도 이 마을 앞은 지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또 나라가 병탄된 소식을 마을 사람 이을상이 독립운동가 이응수로부터 전해 듣고 김병태의 주장으로 5일간을 국상으로 정하고 성인은 굴건제복을 하고 미성년자는 복대를 두르고 부녀자는 소복으로 매일 만천봉에 올라 북쪽을 향해 망배를 드렸다.
만천봉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있은 지 3일 만에 주동자는 모두 추풍령 경찰관주재소에 연행돼 16명이 머리를 깎였는데 무지한 소치라 해서 이튿날 방면됐다.
양천동 시위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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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로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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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 때 양천동 하로(중리)에서도 이석동이 경영하는 서당 하신정에서 시위운동을 준비하면서 참가하는 동민들에게 배부할 태극기를 다량 제작하고 있었는데 김천군청 관리가 일경에 밀고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김천헌병대 만세시위
서울에서 있었던 3·1 독립시위운동의 소식을 들은 조마면 신안리 주민 최무길은 4월 5일 하오 8시 혼자서 평화동에 있는 일본헌병분대 구내에 들어가 “대한독립 만세!”를 3창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 구금돼 모진 매를 맞고 재판에 회부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태형 90을 언도받았다.
일본 헌병대 투서 사건
1921년 2월 4일 김천공립보통학교(김천초등학교) 2학년생 임원성(17세)이 “대한독립 만세 일본 패망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

입력 : 2017년 03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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