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릇된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공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일부 공직자들로 인해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며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대다수의 공직자들까지 함께 비난을 받게 되고 나아가 공직사회 전체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이것이 더 걱정이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우리고장 하로마을에서 출생한 노촌 이약동이라는 한 관리의 청렴결백한 생애를 통해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조선시대 공직자들의 청백리정신을 다시금 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편집자 주>
|
 |
|
↑↑ 이약동 선생 묘소 |
ⓒ 김천신문 |
|
|
 |
|
↑↑ 하로서원 |
ⓒ 김천신문 |
|
평정공 노촌 이약동 선생의 삶
이약동은 1416년(태종 16년)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해남현령을 역임한 벽진이씨 이덕손(李德孫)과 고흥유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춘보(春甫),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다. 할아버지는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지낸 이존실(李存實)이고 외할아버지는 공조전서를 지낸 유무(柳務)이다. 부인은 정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며 장인은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지낸 이지명이다.
소년기에 개령현감을 역임한 영남의 대학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김숙자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봉계출신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우했다.
26세 되던 해인 1441년(세종 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헌부감찰(39세), 성균관직장(43세), 증광시 정과로 급제해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이 됐다. 이후 사헌부감찰을 거쳐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면서 청백리의 기틀을 다졌다.
1458년(세조 4년) 유장(儒將)으로 천거되고 특별히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됐다. 1459년(세조 5년) 부모님이 연로해 사직했으나 청도군사로 봉양을 허락 받고 지극한 효성을 보여 주위로부터 명망을 얻었다. 1461년(세조 7년)부터는 청도군수직마저 사임하고 부모님 약을 직접 챙기며 모시기를 한결 같이 했지만 다음 해 돌아가셨다.
1464년(세조 10년) 상기를 마치자 선전관으로 복직됐고 같은 해 종부시정을 거쳐 당상관, 귀성절제사(龜城節制使)가 됐다. 1467년 4대를 이끌고 이시애(李施愛) 토벌에 참여해 종고대(終高臺), 북청(北靑)에 주둔하면서 전공을 세웠다. 1468년(세조 14) 병으로 사직했으나 1470년(성종 1) 제주목사가 됐다.
평정공은 성정이 부드럽고 인자해 지방관으로 재임시 가는 곳마다 칭송이 따랐는데 특히 제주목사로 재임한 1470년부터 3년간의 공직생활은 이약동 선생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지표가 됐을 뿐만 아니라 참 공직자로서 나아가야할 길을 안내해주고 있다.
|
 |
|
↑↑ 이약동 선생 산신단기적비 |
ⓒ 김천신문 |
|
공물을 가로채는 쥐새끼는 누구인가
1470년 이약동이 제주목사로 부임해 관리들의 근무행태와 공물을 보관하는 창고를 확인해보니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중죄인들이 귀양살이를 하는 멀리 떨어진 섬에 불과해 농사가 발달하지도 않아 물자가 항상 부족함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아의 벼슬아치들이 중간에서 공물을 가로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일이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이약동은 각종 공물과 세금에 관한 문서들을 하나하나 검사한 결과 관리들이 상당한 양을 중간에서 착복한 것이 드러났다.
|
 |
|
↑↑ 산천단 |
ⓒ 김천신문 |
|
이약동은 그들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받아들인 공물이 다 어디로 간 것이냐? 중간에서 누군가가 횡령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양이 사라질 리가 없다.”
“횡령이라니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마도 쥐가 먹은 것 같습니다.”
“예, 쥐가 들끓어 곡식이 없어지는 일이 잦습니다. 늘 있는 일이지요.”
관리들은 쥐 핑계를 대면서 자신들이 곡식을 가로챈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러자 이약동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거둬들인 구운 소금이 사라진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그것도 역시 쥐가 먹어 없어진 것이냐?”
“그렇지요. 쥐가 많아 없어지는 양이 상당합니다. 매년 있는 일인데 쥐라는 것이 잡기가 어려워 없애기가 힘듭니다.”
관리들이 다시 쥐 핑계를 대자 이약동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쥐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많은 소금이 없어지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쥐가 필요하며 얼마나 큰 쥐가 필요한 것이냐? 이 쥐들은 필경 너희들이렸다!”
그러면서 관리들을 불러 모아놓고 그들의 입에다가 소금 한 바가지씩을 처넣었다.
“어디 한번 또 먹어보아라. 너희 같은 큰 쥐들이 한 바가지도 먹지 못하는데 작은 쥐들이 도대체 얼마나 먹을 수 있단 말이냐? 먹지 못한다면 너희들이 중간에 가로챈 것으로 알고 크게 벌을 내릴 것이다.”
|
 |
|
↑↑ 제주도 곰솔공원 산천제 |
ⓒ 김천신문 |
|
당연히 그들은 소금을 먹지 못했고 큰 벌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로 제주도에서는 소금은 물론 다른 공물과 세금을 중간에서 횡령하는 일이 없어졌고 백성들은 그만큼 윤택해진 삶을 살게 됐다.
또 매년 2월에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산신제로 인해 백성들이 얼어 죽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단을 산 아래로 옮기게 했는데 지금도 제주시 아라동 곰솔공원에 전해지고 있는 산천단(山川壇)이 그것이다.
제주도민들은 산천단 옆에 ‘이약동선생 산천단 기적비’를 세워 감사한 마음을 전했고 제주시 아라동 곰솔공원에서는 지금도 매년 산천제가 행해지고 있다.
제주도 역사서인 ‘탐라지(耽羅志)’에 따르면 이약동 목사가 1474년(성종 5년) 경상좌도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돼 제주도를 떠날 때 관아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남겨두고 말을 타고 나섰는데 성문에 이르러 비로소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제주목 관아 문루 앞 바위에 걸어 놓았는데 세월이 오래돼 삭아 내리자 고을 사람들이 채찍을 바위에 그림으로 그리고 괘편암(掛鞭岩)이라 했다고 한다.
또 출항한 배가 풍랑으로 침몰할 지경에 이르자 선생이 부정한 짓을 행한 일행이 있는지 단속하자 수행한 비장(裨將)이 제주고을 사람들이 말하길 “미리 선물을 드리면 필시 목사께서 받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육지에 당도하면 전해달라며 맡긴 갑옷을 받았나이다” 라고 자백했다. 크게 놀란 이약동은 즉시 갑옷을 바다에 던지게 했더니 풍랑이 가라앉았다 해서 투갑연(投甲淵)이라는 전설을 낳기도 했다.
제주도 역사서인 ‘탐라기년’(1470년, 성종 원년)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한라산신묘를 세웠다. 이전에는 매번 한라산 정상에서 제를 올렸는데 얼어 죽는 자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고을 남쪽의 작은 산 아래에 묘단을 만들어 세웠다. 곧 산천단이다. 이약동은 백성을 다스리는 대체(大體)를 알아 청백리로 칭송된다. 임기가 다 돼 돌아갈 때 옷가지와 말을 모는 여러 도구 등 관(官)에서 갖춰 사용하던 것들을 관청에 모두 두고 한 필의 말로 떠났는데 채찍은 관아의 누각에 걸어뒀다. 살피건대 공이 사냥을 나갈 때에 일찍이 채찍 하나를 지녔었는데 돌아갈 때에 이르러 이 땅에서 난 물건이라 해서 관아의 누각에 걸어두니 뒷사람이 이를 소중히 간직해 새로운 목사가 도임(到任)할 때마다 매번 아뢨다고 한다. 바다를 건널 때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배가 갑자기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사공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얼굴이 하얘졌다. 공이 꼼짝하지 않고 바르게 앉아있자니 부관(副官) 하나가 앞에서 고하기를 “고을사람들이 공의 맑은 덕성에 감격해 포갑(鮑甲) 하나를 보내어 주면서 공의세면도구로 갖추어 쓰게 했습니다. 아마도 신명(神明)께서 이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했다. 공이 즉시 이것을 바다 속으로 던지라 명하니 이에 순조롭게 건널 수 있었다. 뒷사람들이 그곳을 가리켜 투갑연(投甲淵)이라고 한다.
1477년(성종 8) 사간원대사간이 돼 법제적인 언론 활동은 물론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제주도민들의 고충을 익히 확인하고 온 터라 제주도민들의 진상품을 줄이도록 건의했고 사냥을 줄여 도민들의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제주백성들의 유학 교육을 위해 수령을 임명할 때 문인과 무인을 교대로 보낼 수 있도록 진언하기도 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돼 천추사의 직임을 띠고 북경에 다녀왔고 1478년(성종 9년) 귀국해 경주부윤, 1482년(성종 13년) 호조참판으로 중앙 정계에 돌아왔다. 1485년(성종 16년) 동지중추부사가 됐으나 나이가 70세가 돼 치사하기를 여러 차례 간청했으나 성종은 허락하지 않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를 제수했다. 이때 도적을 체포하는 등 민폐를 제거해 민생을 안정시켰고 1487년(성종 18년) 한성부좌윤이 돼 한양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성종의 특지로 이조참판이 됐다.
1489년(성종 20년) 이조참판의 임무가 가볍지 않고 70세가 넘어 정신이 흐려질 뿐만 아니라 용렬하고 어리석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직급이 올라 개성유수가 됐으나 나이가 직임을 감당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결국 병을 얻은 끝에 1491년(성종 22년) 사직이 허락됐다.
76세에 고향인 양천동 하로마을로 낙향할 때 향리에 남은 초가집 한채가 재산의 전부였다고 한다.
이약동은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셋과 사위 넷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명문가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아들은 첨지 이경원, 통정 이승원, 좌랑 이소원이고 사위는 상장군 김순성, 여윤성, 사직 김예강, 현감 강효순이다.
낙향할 때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家貧無物得支分 내 살림 가난하여 나누어 전할 것이 없고
惟有簞瓢盧瓦盆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
珠玉滿籝隨手散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서 욕이 되거늘
不如淸白付兒孫 차라리 청백으로 너희에게 전함만 못하리
또 정부인 완산이씨에게는 질그릇 하나를 남겼는데 고향 초가집에 구멍이 뚫려 비가 샐 때 부인이 받은 질그릇으로 빗물을 퍼내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청렴 개결했고 은혜로운 정사가 많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았고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궁핍한 말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514년(중종 9년)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청백리(淸白吏)를 천거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선생의 청백리 행적이 상세히 기록돼 전한다.
육당 최남선(崔南善)은 이약동 선생을 우리나라 최고의 청백리로 꼽기도 했다.
1493년(성종 24년) 78세를 일기로 이약동이 졸하자 성종(成宗)은 예관으로 동부승지 이자근(李自建)을 보내어 제문을 내리고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후 제주 귤림서원 영해사와 김천 경렴서원에 제향됐으며 현재 양천동 하로서원 청백사에서 매년 음력 3월 상정일에 향사가 봉행되고 있다.
|
 |
|
↑↑ 하로서원 청백사를 방문한 시민들 |
ⓒ 김천신문 |
|
|
 |
|
↑↑ 이약동 청백리백일장 |
ⓒ 김천신문 |
|
|
 |
|
↑↑ 춘향제 |
ⓒ 김천신문 |
|
지난해에는 이약동 탄신 600주년을 기념하는 춘향제와 청백리백일장, 청백리 이약동 학술대회가 열렸다.
올해는 3월 31일에 하로서원에서 선생의 청백정신을 기리는 춘향제와 청백리 백일장, 노촌당 중수 고유제 등 선생의 청백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년 전부터 이약동 선생의 청백리적 삶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청렴교육의 일환으로 각 공직기관을 중심으로 하로서원과 청백사 참배가 이어지고 있어 앞으로 이약동 선생의 자취가 묻어있는 하로서원이 전국적인 청렴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자료제공 김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