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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비문증(飛蚊症)

이복희(김천 출신 구미 거주 수필가)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17년 08월 29일
ⓒ 김천신문
내 눈 속에 화가가 들었나 보다. 하루는 날파리를 그려 올리고 또 하루는 점인가 싶은 실지렁이를 그려 올린다. 때로는 뿌연 안개를 배경으로 머리카락같은 비도 내린다. 잡으려 해도 도무지 잡히지 않고 위로 갔다가 아래로 갔다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날파리는 종횡무진이다. 종일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을 쫓아다니느라 감은 눈조차 아프다.

안경을 벗으면 코앞의 남편 얼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고도근시다. 안과 의사는 ‘남자라면 군 면제에 해당하는 시력’이라고 한다. 겉보기에는 멀쩡하나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나 마찬가지다. 대개는 성장기를 지나면 고정 시력이 된다고 하는데 내 시력은 내리막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계속 곤두박질이다. 종합검진을 받을 때마다 고정적으로 재검진 대상이 되니 늘 심기가 불편하다. 나이가 들면서 안압도 올라 자주 머리가 아파온다. 게다가 안구건조증까지 겹쳐 바람이 불거나 건조한 날에는 뻑뻑한 눈에 인공눈물을 달고 있다.

어느 날부터인가 눈앞에 먼지나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처럼 무엇이 어른거린다. 눈 속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처럼 성가셔서 자주 비볐다. 눈이 가렵고 충혈 되어 안과를 찾았더니 날파리증 즉 비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고도근시이거나 노안으로 인해서 생기는 증세라고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내 눈 속에 늘 날파리가 든 것처럼 찜찜했다. 딱히 눈을 혹사시킨 적도 없거니와 친정 다섯 남매가 다 안경을 쓰기는 하지만, 나만큼 고도근시가 아닌 것을 보면 유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노화현상이라고 인정하기엔 아직은 억울하다.

처방치고는 너무 무성의하다. 신경 쓰지 말고 적응하며 살라고 한다. 눈만 뜨면 날파리가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어떻게 곤두서는 신경을 잠재우겠는가. 눈꺼풀 찡그려가면서 움직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눈동자를 움직이며 따라가면 슬그머니 없어지는 듯하다가 어느새 또 다른 티끌이 나타나 눈 속을 헤집고 다닌다. ‘이러다가 신경쇠약증에 걸리면 어쩌나!’ 의사의 말대로 무시해 보기로 했다. 초점을 다른 곳으로 맞추려고 노력하니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츰 덜 보이기 시작했다. 떼어 낼 수 없는 혹이라 여기고 함께 살자고 다독이며 살 수밖에 없겠다.

내게 찾아온 비문증에는 뿌연 안개 속에 희미하게 그려지는 고향 마당이 있다. 삼십 촉 백열등 아래 구멍 난 양말을 꿰매시던 어머니의 구부정한 등허리가 애처롭게 다가온다. 바늘구멍 찾다가 연신 실에 침 바르고 이내 마당 귀퉁이 모깃불로 눈길을 돌리셨다. 눈치 없는 날파리 놈들이 백열등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땐 어머니의 흐려진 눈이 매캐한 모깃불 탓인가 했다. 눈앞의 검불도 걷어 내지 못하는 내 나이 또한 어느새 불혹을 지나고 보니 어머니가 눈가를 자주 비비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보다 못한 남편이 시력 교정수술을 권했다. 혹여 잘못 되어 앞이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하는 걱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두 딸도 라식수술 후 안경을 쓰는 불편에서 벗어났기에 다져먹은 마음이 변하기 전에 병원을 찾았다. 워낙 고도근시라 인공렌즈를 삽입하는 수술을 했다. 산부인과 이래 수술대에 오르는 일은 처음 겪는 일이다. 내 눈 속의 수정체를 걷어내고 인공수정체를 넣는 수술은 손과 발이 다 오그라들게 했다. 수술하는 동안 눈 속에서 별들의 전쟁이 일어났다. 빨리 이 혹성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숯검댕이처럼 타들어간다. 나의 긴장으로 인해 의사가 실수할까 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깍지 낀 두 손엔 진땀이 흥건한데 바짝 타들어 가는 입안은 물기 없는 묵정밭이었다.

포르투갈의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가 생각났다. 아무도 볼 수 없을 때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인공은 무서운 두려움을 느낀다. 그와는 반대지만 다른 사람은 다 볼 수 있는데 나만이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느껴질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진다. 어쩌면 나는 지금껏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볼 수 있으면서 눈먼 사람처럼 살아온 것은 아닌지. 이제는 외면해 온 곳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밝고 따뜻한 눈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내가 보아온 지난 세상은 오목렌즈를 통해 보는 축소판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뿐 아니라 손톱이, 동전이, 하물며 밥 알갱이까지도 모두 크게 보였다. 작아졌던 것들의 반란 앞에 비대해진 세상은 물먹은 압축 스펀지였다. 동공에 얹힌 인공 수정체는 몸 부풀린 것들의 비밀을 하나 둘 내게 알려줬다. 남편 얼굴의 주름과 잡티가 훤하게 다 보였다. 어디에 숨었다 나타났는지 숱한 점들도 그대로 드러났다. 남자도 미용에 신경을 써야할 때라며 억지로 피부과로 데리고 갔다. 눈에 거슬리는 큰 점들만 서른세 개를 제거했다. 그러고도 자꾸만 그의 얼굴을 뜯어보게 된다. 안보고 대충 넘어가도 될 것을 잘 보여서 남편만 성가시게 되었다.

눈앞이 환해지고 나니 새 세상이 열렸다. 책도, 컴퓨터도, 아들 녀석 콧잔등의 여드름까지도 안경을 쓰지 않아도 잘 보인다. 오랜만에 보는 지인은 뭔가가 달라진 얼굴이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양미간을 찡그리던 버릇도 없어졌다. 잠결에 화장실 갔다가 변기통에 엉덩짝 빠질 일도 없어졌다. 청맹과니가 눈을 뜬 것이다. 현대 의학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비문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잘 보였다. 밝아진 세상에 더 좋은 볼 것들이 많은데 굳이 내 눈 속의 티끌을 애써 볼 이유가 뭐 있겠는가. 이제는 눈 안에서 명멸하는 그림이 아니라 눈 밖에서 자유롭게 펼쳐질 세상으로 눈 뜰 차례다.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면 안개 자욱한 밑그림이 펼쳐져 있는 듯하다. 그곳에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으려 더듬거리는 내가 있다.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17년 0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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