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정신문화를 오늘 다시 가슴으로 접하는 순간이다. 그 길을 안내하는 한 예술가의 정성이 참으로 귀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그 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진작가 박광제의 사진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고귀한 정신세계를 다시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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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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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도리사 극락전>
도리사는 아도화상(阿度和尙)이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고 있음을 보고 절을 지었다는 유래가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절이다. 전설만큼이나 극락전의 추녀가 심상치 않다. 곡선의 흐름은 뒷산의 능선과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은 자연과 함께한다. 마치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갈 듯하다. 극락전은 부처가 설법을 전하는 법당이다. 설법 속에 담긴 진리가 하늘을 날아 서방정토 곳곳에 전해지는 것만 같다.
작가 박광제는 도리사를 몇 번 다녀왔을까? 절에 이르는 길은 아름답지만 경사가 급하고 오르내리는 길이 만만찮은 길이다. 극락전 처마에 안에 감쳐진 단청, 그 화려함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빛의 각도와 하늘의 구름을 얼마나 살폈을까? 또 계절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녹음이 짙어진 뒷산을 배경으로 했을 때 단청이 더 아름다웠을 거다. 그날을 담기 위해 한 번 두 번 일곱 번씩 다녀왔다는 작가의 말에 그 집념이 옆 보인다. 집념이 예술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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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 궁기동 석불상>
눈을 지그시 감고 보면 석불의 온아함이 보인다. 비바람 맞으면서도 세월을 이겨낸 잔잔한 미소다. 석불은 협시보살(脇侍菩薩)의 모습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다. 이렇게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협시보살이라고 한다. 문수보살은 지혜(智慧)를, 보현보살은 서원(誓願)을 상징한다. 부처는 문수와 보현을 세워 지혜를 서원하라고 설파한다. 굳이 지혜를 갈망(서원)하라고 말을 하는 것 같다.
석불에는 이끼라는 흔적이 시간을 감싸고 있지만 부처의 지혜는 오늘도 목탁소리만큼 선명하게 들리는듯하다. 감춰진 목탁소리는 잠자는 진리를 깨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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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고려 말의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충절을 기린 비(碑)다. 글씨 「지주중류(砥柱中流)」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이 썼고, 뒷면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그 뜻과 후손에게 주는 교훈을 새겨놓았다. ‘지주’는 중국 황하강에 있는 돌산인데 “흘러가는 물속에 비친 그림자조차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지주산’처럼 세상 욕심에 흔들리지 않고 절개를 지킨 길재 선생을 기리기는 뜻을 담고 있다.
인근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남구미 나들목을 내려서서 조금 들어와 왼편에 장대한 검은 비석(砥柱中流碑)이 낙동강의 물살을 지켜보고 있다. 물살은 비석을 휘감고 흐르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유성룡이 후세에 전하는 교훈이다. “천하의 물은 반드시 스스로 지킴이 있어야 능히 상대를 이길 수 있으니, 저 지주(砥柱)는 오로지 높고 굳다. 옳지 않음에서 오는 부귀는 오직 뜬구름 같을 진데 어찌 한 올의 머리털인들 움직일 수 있을까 보냐? 이렇다면 욕심이란 홍수요 본심은 지주다.”
이렇게 한걸음에 길재와 유성룡의 흔적을 만났다. 그리고 물과 산을 보았다. 산과 물은 그대로인데 길재와 유성룡을 어디서 다시 만난단 말인가! 어쩌면 사진 속의 묵직한 ‘글자 4수’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금이 간 비석에서 길재의 충절과 유성룡의 애국심 그 에너지를 느낀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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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인문화류씨묘지명지석>
매계 선생의 효심과 높은 학식이 500년이 지난 오늘 새롭게 울림을 주고 있다.
매계(梅溪) 조위(曺偉) 선생의 어머니(정부인문화류씨) 묘소 앞에 묻혀 있던 귀한 문화제이다. 원래 묘지명(墓誌銘)은 묘소 앞에 묻어두는 것으로 후손들이 돌아가신 분의 공적(功績)을 기리기 위한 거다. (2001년 묘소 보수작업 중 상석 아래서 발견되었다.)
우리 고장 김천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 되어있는 매계 선생은 두보(당나라)의 시를 최초로 언해한 『두시언해(杜詩諺解)』와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 집필하였다.
현재 이 묘지명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위탁 보관 중이다. 김천에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문화제는 제자리를 지킬 때 그 가치가 빛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