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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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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강렬(1892~1929) 선생은 절강편씨로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과 오청계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며 할아버지대에 황해도 연백으로 이주했다. 선생은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片相薰)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7년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해 경상·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고 1908년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해 13도 창의대진소(13道 倡義大陣所)를 결성했으며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할 때 선생은 중군장 허위(許蔿)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해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해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해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황해도 지회에서 은밀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 일제가 날조한 ‘사내(寺內)총독 암살 모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돼 2년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뜻은 변함이 없어 영남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해 결사대와 선전반을 조직 후 맹렬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14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선대의 고향인 김천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서당을 개설하고 어모면과 개령면, 감문면 청소년들을 모아 강학하고 삼성암에서 무술을 연마시켰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동생인 덕렬(德烈)을 상해의 임시정부에 파견하고 황해도 안악에서 최명식(崔明植), 간병제(簡秉濟) 등과 군사주비단(軍事籌備)을 조직해 안악군 대표를 맡았다. 이듬해 5월 밀정의 밀고로 이 사실이 일경에게 알려져 체포되고 1919년 9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2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출옥했으나 부인과 가족은 일제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점포는 모두 채권자에게 탈취당한 뒤였다.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북경과 상해 등지를 전전하며 동지들과 조국광복의 방략을 논의했다. 선생은 무장항쟁이 최선의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정착해 1923년 10월경 산해관(山海關)에서 강진지(姜震之), 양기탁(梁起鐸), 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 단장에 추대됐다.
의성단은 광활한 만주를 무대로 시종일관 열과 성과 담력으로 활약해 민족운동사상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의성단은 주로 장춘선(長春線) 공주령(公主嶺)으로부터 장춘에 이르는 철도 연선의 양측 200여리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250여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장차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에 주력했다.
1924년 선생은 단원들과 함께 장춘성 내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 명을 살상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대낮에 봉천(현재의 심양) 시내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해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戰果)를 올리고 본부로 돌아오기도 했다.
일제는 만주에 있던 경찰력과 밀정들을 총동원하고 총독부 사무관이던 홍모(洪某)를 특파해 선생을 체포하고자 했다.
그러자 선생은 장춘 시내에 ‘아사홍생 아생홍사(我死洪生 我生洪死 :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다)’라는 야유 섞인 벽보를 붙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24년 7월 길림(吉林)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의 개최를 주도해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광정단, 대한독립단, 통의부, 노동친목회 등의 대표들과 함께 독립군 조직의 통합을 논의했다.
8월에는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전가전(傳家甸)으로 가서 군자금 500원을 모집하고 하얼빈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統一會)를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미리 탐지한 일경에게 포위를 당했고 장시간의 총격전 끝에 체포됐다.
1924년 8월 22일 신의주로 압송되고 1925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이 확정됐다. 판결언도가 있었던 재판정에서 선생은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의연하게 돌아서서 재판관과 방청객을 놀라게 했다.
2년간 신의주형무소에서 고문과 옥고로 시달릴 대로 시달린 끝에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일제는 1926년 9월 28일 병보석으로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입원에도 불구하고 회복기미가 없자 가족과 친지들이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선생은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하다 1929년 1월 16일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남산공원에는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