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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청암사는 직지사와 더불어 김천을 대표하는 절이다.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단출한 사찰이어서 세인에 잘 알려있지 않지만 비구니 사찰이어서 조용하고 정갈하다. 최근 인현왕후와 일제강점기 육영사업의 어머니로 일컬어지는 최송설당이 청암사와 관련 있음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테마관광지로 전에 없는 주목을 받는다. 인현왕후길이 알려지며 더욱 그러하다
인현왕후길을 걸으며 그 시대의 역사를 톺아본다.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으며 따라 부르던 노래 하나가 있다. 미나리요란 민요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일세
철을 잃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으니
제 철 가면 어이 놀까
제 철 가면 어이 놀까. 미나리는 민 씨 성의 인현왕후를, 장다리는 장희빈을 가리킨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영욕을 표현한 것으로 봐 숙종 때부터 불려 졌으리라. 민 씨의 인현왕후는 영원하지만, 장씨 성을 가진 희빈의 영화는 한 철에 불과할 것이란 예언성이 깃들어 있다.
숙종과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막심했나 보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 간의 정권 다툼이 가장 심했던 시기가 숙종 때였다고 역사학자들은 평한다. 숙종은 열네 살에 즉위해 친정(親政)하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애썼다. 백성의 피해를 덜고 국가 재정을 재편성하기 위해 대동법이란 세금제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사육신의 관직을 복귀시키고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귀시키기도 했다.
가정 예절서 ‘가례원류’와 인문지리 도서 ‘신증동국여지승람’도 이때에 나왔다. ‘가례원류’는 원래 유계와 윤선거가 지은 것을 뒤에 윤선거의 아들 윤증이 증보 발간했다. 윤증은 윤석열 검찰총장의 선조다. 나라에서 판서, 찬성, 우의정까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한 인물로 전한다.
한편 이전부터 내려온 붕당정치의 폐단이 폭발하기 시작한 때가 숙종 대가 아닌가 한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이라 불리는 정변들이 이때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 때마다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집권당을 교체하는 이른바 환국정치를 폈다. 이로써 당대의 얼마나 많은 명사들이 귀양 또는 죽임을 맞았나. 성격상 숙종이 애증 편향이 심함을 대신들이 정치 쟁점화 하여 정치판을 격화시킨 측면도 컸던 것 같다.
인현왕후는 어떤 여인이었나. 숙종이 스물한 살 때에 열다섯 나이로 계비가 되었다. 왕후의 큰아버지는 대사헌, 둘째 큰아버지는 좌의정, 아버지가 호조판서를 지낼 때였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서인의 거두였는데 임금의 장인이 되며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인현왕후를 총애하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궁중에서 쫓겨났던 장옥정이 다시 궁궐로 들어오게 됐다. 장옥정이 종4품 숙원이 되며 두 여인의 숙명적 라이벌 관계가 전개된 것이다. 인현왕후는 서인 측의 선발투수, 장희빈은 남인 측의 핀치히터였다.
역사와 사극을 보면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여인 간에 왕자를 갖기 위한 노력과 다툼은 필설로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음식에 약물 투입, 그에 의한 발병, 불임,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암투까지. 승정원일기에 인현왕후의 신체 증상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450여 건, 질병에 관한 언급이 2천여 건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다.
인현왕후는 아들을 갖지 못했다. 장옥정이 아들을 낳아 원자(元子), 세자로 책봉되면서 희빈으로 승격되고 민비는 폐위돼 서인(庶人)이 됐다. 인현왕후가 스물셋, 장희빈이 서른한 살 때다. 왕후는, 임금이 장인을 위해 지어준 집으로 쫓겨났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왕후 아닌 왕후는 몰래 청암사로 숨어들었다. 하고많은 사찰 중 왜 청암사였을까. 왕후의 어머니는 동춘당 송준길의 따님, 동춘당은 상주의 우복 정경세의 사위였다. 인현왕후 어머니의 외가와 청암사가 맺은 인연 덕분이었다.
인현왕후는 폐위된 지 5년 만에 복위됐다. 그중 삼 년 간 청암사 보광전에서 기도한 것으로 전한다. 복위 칠년 되던 해 서른다섯 살에 추석 전날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했다. 두 달이 채 못돼 장희빈도 마흔셋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 제주도로 귀양 가 있던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도 소환돼 국문(鞫問) 끝에 죽는다. 이후 숙종은 빈이 후비로 승격하는 일을 법으로 금했다. 궁궐로 올라간 인현왕후가 청암사로 보낸 감사의 편지(인현왕후어제등록)가 최근 공개돼 세인의 주목을 끈다.
보광전 앞 수각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 마신다. 저녁 범종소리 은은히 세상을 울린다. 나라의 지도자가 정쟁에 휘둘리면 국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