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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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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시(詩)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시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흥얼거렸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긴 시는 종종 중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곤 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득해 오는지요. 그래서 눈에 띄는 것이 짧은 시였습니다. 짧은 시 한 편이 주는 강렬한 맛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깊은 감명을 남깁니다.
독자에게 사랑받는 짧은 시는 어떤 시 일까요! 시를 감상하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딱히 정답을 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만, 쉬우면서도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긴 여운을 남기는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평소 즐겨 읊는 짧은 시 몇 편을 소개합니다
그 꽃
고은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 시를 읽는 순간 가슴에 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시에는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이 짧은 싯구에 가득해 보입니다. 저는 젊은 날에 꿈을 이루기 위해, 생존을 위해 불철주야 달렸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만나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
나이 70에 이르러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정점을 찍고 내려오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소중한 가치를 비로소 만나 보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정의니 진리니 가치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건 모두 번뇌일 뿐이라 여겨집니다.
확 눈길을 끄는 화려한 꽃보다 담장 밑에 핀 작은 풀꽃 하나, 보도 블럭을 뚫고 나온 민들레 하나에도 사랑의 눈길을 보내는 따뜻한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양파
조희범
얇은 옷 벗겨
허연 속 살 만지는 초면
잡수시는 맛은 어떠세요
왜 우세요
네 줄 싯구가 함축한 중의( )를 자동 우산을 펼치듯 확 펼쳐 보입니다. 참 에로틱하지요. 양파 껍질은 눈물깨나 흘리며 벗겨야 말간 속살이 드러납니다.
사람도 마음 안팎을 벗겨봐야 내면의 속살을 볼 수 있지요. 양파의 외면과 내면은 우리 인간의 겉과 속을 무척 닮아 있습니다. 육신과 영혼의 접목을 돌이켜 보게도 합니다. 명함 속 내 직함을 걷어내면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노을
김종선
그대 떠난 창가에
노을이 곱다
지는 해 건져다
찻잔 속에 넣고
그리움 한 스푼 풀어
휘휘 저으면
그대 얼굴
노을처럼
우러날거나보고 싶은 얼굴이 몹시도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그리움에 풍덩 빠집니다. 어디에 날 위해 눈 감은 사람 있을까. 먼저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는게 사람 마음인가 봅니다.
와시다 기요카즈(1949~ )의 “기다린다는 것”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사람의 ‘그리움’을 그린 것 같습니다. 그는 ‘목을 빼고 기다리고, 마음을 다잡아 기다리고, 숨죽여 기다리고, 몸부림치며 기다리고, 멍하니 기다린다.’라고 했습니다. 젊은 날 저도 그러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 중엔 보람 없는 기다림도 있고, 기적 비슷한 기다림도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고통이자 즐거움이지요. 눈을 감아도 보고픈 마음은 호수 위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더 크게 번져갑니다.
산
김영호
산은 홀로 있어도
슬퍼하지 않는데
나는 비만 와도
주막에 있다
산다는 일은 산을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속에 더 깊이 천천히 천천히 들어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삶의 깊이가 너무 까마득해 어디가 끝인지 도통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깊이 있는 사람이 되기에는 지나온 삶이 초라하고 마음이 황톳물 색깔이어서 너무나 초라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가끔 주막에서 술잔을 기울이는지도 모릅니다. 거창하게, 깊이 있는 인생길은 제쳐 두고 평범한 인생길도 행복하다 생각하며 그저 편안하게 이 길로 달려가려 합니다.
가끔 제가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 마음 속에 적어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긴 여운을 남기는 짧은 시 한 편을 발견하곤 음미하며 실행해 가기입니다. 인생의 지혜를 담은 한 편의 시가 가슴을 적십니다. 내가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만드나 봅니다.
어느 시인이 설파한 것처럼 읽는 건 남는 장사입니다. 시인은 시 쓰느라 엄청 고생하는데, 독자가 휙 지나쳐 읽으면 별 소용없겠지요. 쓰는 것 또한 남는 장사라고 했습니다. 읽는 것은 거품처럼 금세 사라져도, 글 한 편 쓰면 오래 남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 짧은 시 한 편을 읽든 쓰든 남는 장사 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