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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과 힐링-천혜의 비경 품은, 천년 사찰 청암사

인현왕후가 청암사로 보낸 편지 읽으며
청암사 세진암과 보광전과 백련암 그리고 인현왕후 둘레길에서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0년 08월 13일
↑↑ 민경탁 논설위원
ⓒ 김천신문
조선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는 남인 세력의 견제로 폐위 돼 궁에서 쫓겨 안국동 사가로 나앉았다. 남인 세력의 감시와 도둑이 드는 등으로 신변이 불안해 지자 첩첩 산중, 절벽 우거진 김천 청암사와 울진 불령사 등으로 숨어들었다.

인현왕후와 관련해 울진 지방에 전해오던 전설이 하나 있다. 왕후가 울진 불영사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독약 그릇을 앞에 놓고 하염없이 울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천축산 불영사의 노승이 ‘3일만 기다리시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 사라졌다. 이에 왕후는 3일을 더 기다려 복원됐다는 것이다.
왕후가 환궁 후 꿈속의 그 노승을 찾았는데, 형상이 불영사 양성법사 같은지라 수소문해 보니 이미 법사는 열반(중종 11년, 1516)한 뒤였다. 왕후는 은혜에 보답코자 불영사에 산과 전답을 하사했다. 이 전설은 2002년 불영사의 의상전을 개축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사실로 확인됐다. 불영사에서는 왕실과의 이런 인연으로 인현왕후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불영사 역사에 의하면 인현왕후의 원당으로 간주되고 있는 의상전은 1616년(인조 때) 창건하여 인현왕후가 돌아가시고 난 후 1810년(순조 10)에 중창하였다. 지금 존재하는 의상전은 1867년(고종 4)에 중건한 것이다(손신영, 울진 불영사 의상전 연구).

↑↑ 인현왕후가 기도하던 보광전
ⓒ 김천신문

청암사에서는 이곳에서 기도하다 복위돼 올라간 인현왕후가, 청암사로 보낸 편지가 공개돼 세인의 관심을 모은다. 인현왕후는 폐위 후 3년간(1692-1694)을 청암사 보광전에서 기도하며 복위를 빌었다. 어머니 은진 송씨 외가와의 인연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왕후는 시녀 한 명을 데리고 은거하며 기도하고 근처 일대를 다니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그 길이, 지금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인현왕후둘레길’이다.

↑↑ 청암사 백련암
ⓒ 김천신문

청암사 백련암에서 발굴된 인현왕후의 편지는 현재 직지성보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일반에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 청암사 함원전에 게시돼 있는 이 인현왕후 편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 인현왕후가 청암사로 보낸 편지
ⓒ 김천신문

원문

仁顯王后御製謄錄

世間有七重 三寶及父母君善知識 三寶爲出離之宗 父母爲養命之宗 君爲保身之宗 善知識爲導迷之宗
自予還本以來我孤閒尊者盡忠竭力道合佛心 朗覺月於塵滿使我迅返正位不沈欲坑 致有今日非師之功耶 非多劫之佛力安能如是耶
今聞我還位懇禱倍前不分晝夜與雲師寂師爲我盡賣衣鉢重 靈刹新建祝閣 師之爲我用心我之爲師感恩非人所述哉 故爲師等替送釵盞鞋三種之信
恒爲三寶之禮祝閣改額 爲含元殿永爲祝釐之所
隨喜略助爲究竟之正因 所謂直心菩提者也 於是付囑本宮 永垂後嗣云 乙亥五月日 星山佛靈山
                                                                                                                                                                  

- 청암사

↑↑ 인현왕후
ⓒ 김천신문

번역

인현왕후께서 지으시다

세간에는 일곱 가지 근본이 있으니 불·법·승 삼보와 부모와 임금님과 선지식이겠지요.
삼보님은 무명과 번뇌를 벗어나게 하는 근본이고 부모는 낳아주고 길러준 근본이며
임금님은 우리 몸을 보존케 하는 근본이고 선지식은 미혹에 빠진 중생들을 인도하는 근본입니다.
내가 본가에 돌아온 뒤로부터 우리 고한존자께서 충정과 기력을 다하여
도가 불심에 계합해 밝은 깨달음의 달이 속세에 가득 차, 나를 빨리 복위케 하여
욕망의 구렁에 가라앉지 않게 하셨으니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스님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오랜 세월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야, 내가 환위하고서도 전보다 갑절이나 간절히 밤낮없이 운 스님, 적 스님이 나를 기도하고
옷과 발우를 다 팔아서 신령한 절을 중창하고, 축원하는 전각을 새로 지으셨다 들었습니다.
스님께서 저를 위해 마음 쓰심과 제가 스님을 위해 은혜에 감사함은 다른 이가 말할 바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스님들께 비녀와 잔과 신 등 3가지를 신표로 바꾸어 보내드립니다.
늘 삼보께 예를 올리는 축각의 현판을 바꾸시어‘함원전’이라 하고
길이 복을 비는 처소로 삼으소서. 따라서 기뻐하며 조금이나마 보태어
이를 정인(正因)으로 삼고자 하니 이른바 진여를 바로 헤아리는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이에 친정에 부촉하여 길이 후손에 전하고자 합니다.
을해년 5월 어느 날 성산 불령산으로 부침.

- 청암사


해설

인현왕후께서 지으신 글을 옮겨 적다

세간에는 일곱 가지 근본이 있으니, 불자의 세 가지의 귀의 처(佛·法·僧)와 부모님과 임금님과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훌륭한 지도자이겠지요.
삼보는 무명(無明)과 번뇌를 벗어나게 하는 근본이고 부모는 낳아주고 길러준 근본이며
임금님은 우리 몸을 보존케 하는 근본이고, 바르게 이끌어주는 지도자는 미혹에 빠진 중생들을 인도하는 근본이지요.
내가 본가에 돌아온 뒤로부터 청암사 고한 주지께서 충정과 기력을 다하여
그 도가 불심에 꼭 들어맞아 밝은 깨달음이 속세에 가득 차, 나를 빨리 복위케 하고
욕망의 구렁에 가라앉지 않게 하셨으니 오늘 이같이 된 것은 고한 큰스님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오랜 세월 부처님이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힘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복위되고 나서도 운 스님, 적 스님이 전보다 갑절이나 간절히 밤낮없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옷과 밥그릇을 팔아서 신령한 절을 중창하고, 축원하는 전각을 새로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스님께서 저를 위해 마음 쓰심과 제가 스님을 위해 은혜에 감사함은 다른 이가 함부로 말할 바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스님들께 비녀와 잔과 신 등 3가지를 나의 징표로 바꾸어 보내드립니다.
늘 삼보께 예를 올리는 축각의 현판을 ‘함원전’(근원을 품은 집)이라 바꾸시고, 길이 복을 비는 처소로 삼으소서. 따라서 기뻐하며 조금이나마 보태어 구경 직접적인 원인으로 삼고자 하니, 이른바 바른 마음으로 불도의 과보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이에 친정에 부탁, 위촉하여 이를 길이 후손에 전하고자 합니다.
1695년 5월 어느 날 성주 불령산으로 부침.

- 민경탁
  

1695년(숙종 21)은 인현왕후가 복위된 바로 그 다음 해다. 불령산은 수도산의 별칭이며 당시에는 성주에 속해 있었다. 편지는 청암사 큰 스님의 영험한 기도 덕분으로 복위되었음과 그 고마움을 진심으로 담고있다. 성품이 원래 인후했던 왕후는 불운과 실의와 고통에서 인내하는 길을 열어준 부처님과 청암사 고한 주지스님, 대중스님들께 감사의 뜻과 함께 비녀와 잔과 신을 보냈다.
왕후는 청암사에서 기도하고 울창한 숲길을 산책하며 상처받은 심정을 치유하고 신변이 불안할 때면 기도만 하고 되돌아가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청암사 세진암
ⓒ 김천신문

편지 표제의 ‘등록(謄錄)’이란 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베껴 기록하다, 옮겨 적다’는 의미이므로 왕후가 구술한 것을 받아 적은 글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당시 왕후의 건강상태나 주변 사정으로 미루어 봐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편지를 친정으로 위촉해 보내니 이를 길이 후세에 전하라 했다. 역사와 그 당시의 정세로 보아 누군가 원문을 필사해 두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청암사는 몇 번 폐사, 전소되었다. 1647년(인조 25)에 한번, 인현왕후가 승하한 뒤 1782년(정조 6년)에 또 한 번, 1912년에도 전각이 모두 소실한 바 있다. 현존 극락전은 1905년(고종 9)에 중건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 편지의 1차 출처가 청암사 백련암이라면 몇 번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이 편지가 남아 전함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서찰은 역사적인 문화재다.

↑↑ 극락교 쪽에서 바라본 청암사 전경
ⓒ 김천신문
↑↑ 청암사 극락전
ⓒ 김천신문

청암사와 궁녀들과의 인연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그녀들이 이 지방을 지날 때면 들러 많은 시주를 했다. 고종 때 영친왕의 보모상궁이었던 최 송설당도 크게 시주한 덕분에 청암사는 중창될 수 있었다. 천년 고찰 청암사의 문화재적 위상과 테마 문화관광지로서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민경탁 논설위원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0년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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