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현대수필의 출발
김천 수필문학의 출발을 이야기하다 (7)
논설위원 민경탁
청암사와 삼복더위 끄기 (靑岩寺와 消夏三庚)
전장억(全章億)
학교 선생님에게 유일한 낙이 있으니 곧 방학이다. 그 중에도 여름방학이 첫째의 낙이 될 것이고 겨울방학이 좀 침울은 하나 둘째의 낙이 될 것이다. 낙이라 해도 사람의 인생관에 따라 천차만별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호주머니에 다소의 푼돈이 저축되어 있어야지 이 유일한 방학도 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방학은 우리 선생님에겐 낙이 아닐 수 없다.
올해는 ‘일하는 해’라 한다. 하기야 어느 핸들 일 아니 하고 살 수 있을까 마는 올해는 보다 일을 많이 해서 잘 살아 보자는 것이라 한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앞서야 할 소중한 욕망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렇고 보니 내가 명명한 이 삼복더위 끄기(消夏 三庚)란 제목이 좀 죄송스럽기도 하다.
여름 하루 일에 겨울 열흘을 산다는데 그저 더위를 보내기 위해서 산사에 든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할 일이 글을 마시고 생각을 토하는 직분이라 할지라도 시원한 자연의 청량제를 들이키면서 산당에 와 간서(看書)한다는 건 이 어려운 세상에 또 저 마다 큰일을 한다는 이 간두의 현실에서 아무래도 못마땅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 지는 것만 같고, 생활은 먹을 것 적고 생각은 빈약해져 점점 쪼그려 들기만 하니 웬 일일까?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이러니 날마다 아이들 앞에 서서 입으로 변명을 토하며 벌을 받아야 하는 우리 샌님에게 유일한 낙이 되는 이 여름방학도 오히려 은근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평일의 생활에서는 무슨 가정적 못마땅함이 있다손 해도 그만 확 몸을 빼쳐 학교로 나가 젊은 얼굴들을 대하면 해소가 되지만 아무래도 호주머니가 텅텅 비어있는 방학 동안은 어쩔 도리가 없다. 어디를 가려해도 흥미가 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죽으나 사나 삼복의 찜질을 집구석에서 견디어야 하고 또 졸라대는 졸개들과 실강이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궁지에서 올 여름방학이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여름 석 달, 삼복더위에 청암사로 공부하러 간다고 우리 학교 선생님에게 강학을 청해왔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옛사람은 이미 겨울 석 달을 족히 독서에 받쳤다고 하는데 우리 학생 제군은 여름 석 달을 족히 독서 연색(硏索)하려는 것인가? 그래서 내 원래 무문(無聞)이지만 내심 다행이라 기뻐하고 더위 끄기의 욕심에서 따라갈 것을 쾌히 승낙했다.
청암사는 불령산이 품에 안고 있고, 불령산은 연이어 안긴 교목(喬木)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열 길 붉은 먼지가 이를래야 미칠 수 없는 아득하고 고요한 선경이다. 청암사의 여름은 더위를 씻기에 이 나무로 족족한 것이다. 나는 지금 청암사의 경내 불령산의 울밀한 수림에 들어 나를 잊고 나무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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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맥문학회 제2회 ‘문학의 밤’ 을 마치고(1960. 8.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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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산은 나무의 산이요, 청암사는 나무의 절이다. 하늘의 해를 가리운 낙락장송은 가락처럼 쭉쭉 뽑은 것이 그저 정숙한 숨소리로만 식식거리고 있다. 그러나 이건 그대로의 숨소리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흐름이다. 벌써 그 숨소리는 나의 몸에 젖어들어 나의 진땀을 씻어 주고 속념을 떨쳐 주고 또 풍진(風塵)을 밀쳐준다. 이리하여 속에 사로잡힌 메마른 심정을 다시 활기 있게 돋궈 주고 윤기를 띄워 준다.
어떤 이는 대상(臺上)의 달을 읊고 송간(松間)의 바람을 마신다고 하였지만 이 식식한 숨소리는 그대로 불심에서 오는 청풍이요 불심(佛心)에서 보내는 영풍(靈風)이다. 솔이 제대로 바람 하는지 바람이 솔을 바람 하는지 나는 모를 일이다. 인간의 시비 소리를 절연하고 이 산에 안겨 저 나무를 보고 또 시원한 바람을 마시면서 세념을 청산하는 나는, 이게 영구한 건 못 되지만 잠깐이나마 청복(淸福)이 아니겠는가? 내 산심(山心)에 안겨 산의 아들이 되려는 게 나의 청암사에서의 자세다. 그렇다. 산이 어찌 속세를 떠났으리오 (山何離俗) 사람이 스스로 산을 멀리 하네 (人自遠山)
내 초초(草草)한 인생이언만 싫도록 산을 새겨 솔바람에 목욕할 것인가. 푸른 나무 겹쳐진 그늘, 사방 이웃을 덮는데(綠樹重陰蓋四隣) 푸른 이끼 나날이 두터워지니, 저절로 티끌이 없어지네(靑苔日厚自無塵)청암사는 푸른 나무 우거진 그늘 속에 덮인 절이요, 청암사의 물은 심곡을 흐르는 이끼 씻는 청랭한 옥로수다. 물 소리를 들으면 심금을 울리고 그 물을 굽어보면 마음이 송구스럽다. 원래 청암은 푸른 바위 곧 청태(靑苔) 덮힌 바위이기에 청암사라 한 것이다. 이 절의 물은 이 청태 위를 흐르는 것이다. 청태 위를 흐르는 물은 그대로 은반을 구르는 옥로와도 같다. 이끼는 제대로 푸르렀고 물은 제대로 맑았거니 어찌 비를 상관할까마는 다만 인간 속물이 티끌과 허물의 몸으로 마구 뛰어드니 오호! 죄스럽다. 허나 착한 것이 물이다. 상선(上善)이 약수(若水)라고 물은 말이 없다. 선악을 가리지 않고 오는 대로 포용한다. 그래서 또 물은 말하리라 ‘너희들이여! 마음의 때도 아울러 씻어가라’고. 내 어찌 청암사의 물을 잊고 돌아갈 것인가. 참으로 청암사의 인상은 물에서 한층 깊다.
이 산사엔 장송이 울울하고 있기에 세념이 미칠 수 없다. 벽계 청류가 산 계곡을 울리고 있기에 시비소리가 들릴 수 없다. 나는 지금 나무를 보고 물을 들으면서 세념을 버리고 더위를 잊고 있다. 나의 주변은 나무와 물 뿐이 아니다. 맑은 공기가 있고 시원한 바람이 있고 짐승과 새의 가락이 있고 우화(羽化)한 매아미의 노래가 있다. 또 청암사의 정숙한 밤이 있다. 달이 있다. 도 닦는 스님의 불경 외는 소리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가 등선(登仙)한 청암사의 별경이다. 그러나 나는 속물이기에 티끌과 허물을 해탈하지 못하고 다만 이중에서 여름을 끄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산문을 나서면 저기는 속계다. 쨍쨍 삼복의 찜질이 중생의 볼을 태우고 목을 달구고 숨을 막고 있다. 그들은 땀을 갈아서 마음의 씨를 가꾸고 있다. 기실 중생을 위하여 땀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중생의 한 사람이다. 왜 중생을 떠나서 잠시나마 이 산에 들었는가? 아! 그렇구나. 지금 내가 몽상에 사로잡혀 있구나. 경각에 눈을 돌리니 나를 둘러앉은 정숙한 서생들이 책을 펴고 원의 중심을 구하면서 그 무엇인가를 사색하고 있다. 나는 나의 글이나 읽어 또 여름이나 끄고 보자. 산당에 고요히 앉아(靜坐山堂) 옛 책의 향기를 찾네(覓古書香) 세상 생각을 멀리하게 됨은(遠其世念) 다만 맑은 바람이 있어서네(只在淸風)
* 맞춤법·띄어쓰기· 한자어의 한국어화, 옮긴이. - 『소문화』(196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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