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박인기 |
걷다
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독서학회 고문·칼럼니스트
왕복 삼십 리를 걸어서 중학교에 다녔다. 그때 나는 추풍령 경사 내리닫는 직지사역 부근 ‘개울마’ 마을에 살았는데, 철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국도가 있었지만, 철길이 지름길이었다. 기차는 뜸하게 다니고, 철길은 적막했다. 촌 골짝이라 중학생도 드물어, 혼자 걷기가 일쑤였다. 도중에 공동묘지도 있었고, 저수지도 있었다. 보리밭도 있고, 콩밭도 있고, 참깨밭도 있었다. 원두막도 있고, 담배 창고도 있었다. 아! 참, 상여집도 있었다.
산자락에 진달래 붉어지면, 풀꽃이 지천이었다. 여름으로 오면서, 뱀과 개구리, 두꺼비도 보이고, 뻐꾹새, 뜸부기, 청둥오리도 철을 알렸다. 침목에 하얀 서리가 비치면, 저수지 둑 억새들은 갈색으로 흔들렸다. 겨울에는 황악산 눈바람을 온몸으로 밀어내며, 고개 수그리고 고행자처럼 걸었다. 걸어서 추위를 떨쳐내었다.
김천극장에 단체 영화관람을 할 때면, 소년은 어두워진 철길을 걸어서 왔다. 그 길에서 공동묘지 귀신불을 보았을 때, 누군가 빠져 죽었다는 저수지 모퉁이를 걸을 때는 고개를 처박다가도, 눈을 들어 초롱초롱한 별을 보며 무서움을 쫓았다. 다수 2동 이로리 마을을 끼고 한 모퉁이를 돌면, 솔밭 사이로 호롱불 비치는 우리 동네 모습이 들어왔다. 소년은 그렇게 걸었다. 아, 그때 내가 디뎠던 철길의 침목들은 지금 어디로 윤회하고 있을까.
아포초등학교 3학년 때 감문면 ‘배시내’로 소풍을 갔다. 왕복 10㎞, 내게는 먼 길이었다. 아포면과 감문면의 경계를 걸어서 넘던 묘한 흥분을 지금도 내 몸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때 내 생애 처음으로 큰 내를 보았다. 물길을 오래 응시하니, 나도 흐르고 있는 듯했다.
내 어릴 적, 지례와 부항을 오가던 길은 험했다. 부항 유촌리에 있는 할머니 댁을 자주 갔는데, 버스가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지례에서 더 못 들어갔다. 내려서 걷는다. 그래도 감사했던 길이다. 산 높고 골이 깊어, 하늘과 땅 사이 호연(皓然)의 기운을 말없이 준다. 루소의 말대로, 자연이 스승이라면, 나는 이 길에서 배운 바가 많다. 그 길도 이제는 부항댐 물 아래 잠기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뻗어 있다.
|
 |
|
그림 : 이영철, 퍼뜩 오이소 |
|
오늘도 나는 내 ‘마음의 길’로 유촌을 향해 걷는다.
1967년 여름, 공부할 책들 울러 매고, 대덕에서 아흔아홉 구비 고개를 넘어 증산 청암사까지 걸었다. 소나무 행렬 장엄한 청암사 산문에 도달했을 때는 걸음이 풀렸다. 한 달 공부가 끝나는 날, 청암사에서 수도암까지 녹색의 수해(樹海) 속을 걸었다. 무념무상, 청운(靑雲)을 걷는 듯했다. 그때 걸었던 고향 산하는 내게 어떤 자양분으로 체화되어 있다. 내게 ‘맑음을 향하는 정신’이 한 조각 있다면, 그 원천은 그때 걸었던 산길에서 찾아야 하리라.
청년 시절, 나는 어머니와 함께 걸어서 교회를 다녔다. 김천여고 뒤쪽, 우리 집에서 모암동 좁다란 긴 길을 따라 어머니와 함께 황금동까지 걸었다. 그 길 위에서 만나던 소소한 풍경들 그리고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들은 어찌하면 좋을까. 작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이 모암동 길을 다시 걸어보았다. 어머니 마음이 숨어서 베푼 모정의 세월이 아련히 번져난다.
내가 EBS PD로 전직했던 20대 후반 어느 해 추석, 저녁을 먹고 아버지와 걸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평화동을 지나 노실 고개를 걸어서 어느 집으로 들어가신다. 아버지와 오랜 인연을 맺은 R 선생님의 댁이란다. 지역 교육계에 어른이신 R 선생님께 나를 인사 올리게 한 후, 아버지는 내게 어울리는 규수감을 구해 주십사 청을 하신다. R 선생님은 따뜻한 호감으로 나를 대하며 규수감 이야기에 더하여 덕담을 말씀하신다. 돌아오는 길, 나는 아버지 곁에 바짝 다가가 걸었다. 아버지와 나의 보폭 사이로 뽀얀 달빛이 따라왔다. 나는 아버지와 걸었던 달밤의 노실 고개를 잊을 수가 없다.
호모 사피엔스, 걷는 인간이 됨으로써 ‘생각하는 인간’이 되었다. 걷는 동안 우리의 몸은 한 부분도 쉬지 않는다. 모든 감관과 근육과 관절이 총체적으로 감응하며 바깥 세계(外物)와 교감한다. 그 감응은 우리의 사유를 역동시킨다. 그리하여 그 ‘감응의 마음’은 뒷날 어떤 ‘정신의 향기’로 부활한다. 걷는 일은 정말 범상한 일이 아니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과는 몸의 감득도 다르고, 정신의 궤적은 더욱 다르다. 어찌 건강을 위해서만 걸을 일인가.
‘걷다’는 동사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향의 길과 고향 땅에 관한 구체적인 ‘걷기의 기억’으로 다가오면, 개념도 선명한 명사의 자질을 품는다. 이 ‘걷기의 기억’에 내 몸이 아는 고향의 정서나 체취가 스며든다. ‘걷다’는 기꺼이 형용사의 상상력도 불러온다. 그래서 ‘걷다’는 마침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내 마음의 영토에서 어떤 가치로 피어오르면 ‘걷다’는 이데아(IDEA)에 가까운 ‘정신’으로 승화한다.
새해에는 고향 길을 자주 걷자. ‘내 몸’과 ‘내가 자란 땅’이 둘이 아님을 느껴보자. 이 또한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실천이 아닐까. 가능하면 아이들과 함께 걷자. 그들 ‘마음의 영토’를 풍성하게 할 것이다. 고향의 이데아를 품고 좀 고단하도록 고향을 걷는다면 더욱 좋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