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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한 그릇-겨울나무 도덕경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1년 02월 04일

인문학 한 그릇

겨울나무 도덕경


이일배

수필가·전 인동고교 교장

오늘도 해거름 겨울 산을 오른다. 지난 철의 갈맷빛이며 황갈, 적갈색들은 사라지고 잿빛이며 연갈색이 산을 덮고 있다. 온통 마른 잎 마른 가지뿐이다. 아니다. 잎은 말라 땅에 떨어져 있을지라도 가지는 결코 마르지 않았다. 나무가 겨울을 사는 방법이다. 제철을 품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에 계절과 나무가 합쳐져 살아있는 나무를 뜻하는 낱말로는 오직 ‘겨울나무’ 하나뿐이다. 어찌 그러할까. 계절의 바탕은 겨울이요, 나무의 근본은 겨울나무이기 때문은 아닐까. 두 근본이 만나 만물의 근원을 이루어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찬 바람이 불어올 무렵이면 나무는 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를 지어 서둘러 잎을 버려 몸을 가볍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몸 몇 곳에 동그란 물주머니를 만들어 명을 이어나갈 최소한의 물기만 갈무리한 뒤 모두 밖으로 내보낸다.
추위를 이겨내는 수단이기도 하겠지만,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이치를 나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찍이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무지이위용(無之以爲用)’이라 했다. ‘없는 것을 쓰임새로 삼는다.’는 말이다. 수레바퀴도 축이 들어갈 곳이 비어 있어야 하고, 그릇이며 방도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 쓰임새가 있다고 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이원수, 「겨울나무」)라는 노래가 있다. 모든 것을 텅 비운 겨울나무는 비록 눈 쌓인 응달에 서 있을지언정 외롭지는 않다. 새로운 것을 맞이할 약동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래는 또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평생을 살아 봐도 늘 한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던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평생 한자리에 살고 있는 처지를 한탄한다는 건가. 평생 한자리면 어떤가. 평생 같은 자리에만 사는 것은 오히려 세상을 향한 욕심을 다 비운 겸허한 마음이 아닐까.
넓은 세상에는 무엇이 있는가. 탐욕과 이기가 끓고 있지는 않을까. 넓은 세상에 대한 견문이란 남을 이기려고만 하는 교만의 지혜에 다름 아닌 것은 아닐까. 나무는 찬란했던 지난 봄여름을 추억하며 다시 그날로의 회귀만을 꿈꾸고 있는가. 그날들을 그리며 휘파람을 불고 있는가.
나무는 지난봄에 아리따운 꽃과 잎을 피울 때도 제 모습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도 않았다. 그 무성하고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들에 제 마음을 오로지 걸었다면 어찌 모든 것을 기껍게 내려놓고 벗은 몸으로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모두 제가 한때에 해내야 할 일로 여겼을 따름이다. 채우는 것도, 비우는 것도 모두 ‘도법자연(道法自然)’을 따랐을 뿐이다.
나무는 거저 묵묵할 뿐이다. 저를 드러내지 않기에 밝고, 저만 옳다 않기에 뚜렷하고, 제 자랑 않기에 공이 있고, 난 척 않기에 오랠 수 있는 것(‘不自見故明,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이라는 『도덕경』의 말씀에 나무를 견주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휘파람 소리도 경쾌하지 않았을까.
다시 겨울 산의 나무를 본다. 나무에게 겨울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방하착(放下着)의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꽃을 피워 벌 나비도 불러보고, 무성한 잎으로 그늘도 드리워 보고, 탄실한 열매로 훗날도 기약해 본 지난 계절 동안의 영화며 번뇌, 애증과 집착 등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훌훌 벗고 조용히 무념무상에 든 구도자의 모습이라 할까.
나무가 들고자 하는 도의 세계란 애써 몰입하여 갈고 닦아 찾고자 하는 세계가 아니다. 겨울이란 모든 것을 비워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 하는 철이기에 그 순리에 따를 뿐이다. 나무는 철과 한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 철의 순리를 따라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울 봄을 기다리며 조용한 생명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는 또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지만, 그 유는 무에서 생긴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라 하여 유와 무는 돌고 돈다고 했다. 겨울은 그 유와 무가 돌고 도는 기점에 자리 잡고 있고, 겨울나무는 그 출발점에 서서 조용히 새로운 생명의 꿈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 겨울이 있고 겨울나무가 있기에 꽃 피고 잎 돋는 봄이 올 수 있지 않은가. 가히 계절의 출발은 겨울이요, 나무의 근본은 겨울나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오늘 내가 해거름 겨울 산을 오르는 걸음은 생명의 바탕을 걷고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제 내 걸음이 무를 향해 간들 어떠하랴. 유무는 상통하는 것이 아니던가. 지금 내가 저 발가벗은 가지가 된들, 저 가랑잎으로 진들 어떠하랴. 봄이면 또 새잎이 돋을 것이 아닌가. 꽃이 필 것이 아닌가.
산을 오르는 걸음은 언제나 가붓하다. 내 안에 새 생명이 곰질대고 있는 것 같다. 겨울 산, 겨울나무 그 생명의 바탕 길에서-.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1년 02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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