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김천 향토문화계의 거목 故 강중구(姜重求)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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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구(姜重求)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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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천문화원장으로서 전국 최초로 문화센터 건립
‘김천문화제’개최 ‘소문화’창간 등 지역문화 활성화에 주력
한국문화원연합회장으로서 전국 지방문화원 확산에 기여
우리고장 김천은 예부터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요, ‘영남제일문향(嶺南第一文鄕)’이라는 수식어로 불리어 왔다.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자리하여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황악, 금오, 대덕 삼산과 감천, 직지 이수가 고장을 감싸 흐르는 형국이니 가히 천혜의 복 받은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말선초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주창하며 많은 유학자들이 이 고장으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고 현인달사를 배출한 까닭으로 노촌 이약동, 매계 조위와 같은 대학자와 청렴한 관리를 배출해 영남에서도 제일가는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명성을 드높였다. 이러한 우리 고장의 문화적 위상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이 이어져 근현대사에 주목할 만한 인물을 배출했으니 이가 곧 초대 김천문화원장을 역임한 강중구 박사라 할 것이다.
강중구 박사는 진주강씨로 일제강점기부터 김천의료계에 이름을 알린 인선병원장 강석준(姜錫俊)의 장남으로 1920년 김천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서울대학교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훗날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경전병원 외과과장을 거쳐 1949년 부친의 가업을 이어 인선병원장으로 부임해 김천의료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문학과 미술,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등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강박사는 의사인 동시에 틈틈이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교류를 하며 향토문화와 예술의 발전이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그의 문학적 재질은 1975년 <봄을 지배하는 신>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한 것으로 증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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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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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봄을 지배하는 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의무장교로 종군하여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폐허로 변한 당시 고향 김천의 현실과 비통한 심정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폐허의 달>
부서진 폐허에도 달은 뜨는가.
지금은 낯설은 들
집도 길도 산도 다같이 무너져
평평한 넓은 들 은빛으로 흐르는 시냇물만이
다만 옛과 다름이 없이
갑자기 없어진 김천의 거리
가도 가도 탄 냄새 썩은 냄새
어수선히 뭉쳐 있는 쓰러진 조각
온 누리가 이즈러져 하나 단단히 버티지 못하고
비뚤어진 형적도 없는 담 모퉁이에 창백한 코스모스
오늘밤 달과 더불어 너 홀로 이 거리를 지켜주노라.
벌레 소리 구슬픈 가운데 섞여 있는 저 소리
제트기던가 아니 B29라던가
왔다 가는 그 동안에 없어진 거리
아우성을 꼭 참고 사람들은 승리에 취하면서 돌아왔건만
냉랭한 서풍과 매운 시월을 가려 줄 문 하나 없네.
동서남북으로 훤-하게 트인 길
기차가 오고 찝차가 간 후에
장차 돌아올 먼 봄을 회상하면서
밤들어 나 홀로 율연히 언덕에 서다.
아아 누구 때문인가.
사라진 거리 다시 일어나도 너는 예전의 너는 아니리.
차라리 나는 여기를 떠나 서쪽으로
그이 사는 곳으로 가서 살고 싶어라.
지금은 낯설은 땅 부서진 거리에도 달은 뜨는가.
<고향>
오랜 병석에서 일어난 것처럼 간신히 고향에 돌아오면
아편 연기 모양 흐르는 하늘과 메마른 들과 산과
헐벗은 미루나무와 거치른 바람 뿐인데
그냥 가슴만은 괜히 흐뭇한 것 같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애써서 고향에 돌아오면
공동묘지와 얼어붙은 시내와 속절 없는 세월과
부산한 거리와 어수선한 골목 낯설은 거짓말 뿐인데
그냥 어이 없는 감사에 취하는 것 같다.
오랜 병석에서 어서 일어나 긴 여행에서 어서 돌아와
고향에 왔다간 가야 할 간단한 손짓에도 설레는
젊은 가슴일랑 태워버리고
이제는 속을 리 없는 먼 나라와 아득한 바다로
혹은 이름 없는 섬엘지라도.
폭격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고향 김천의 참상과 패배감에 잠긴 시민들을 문화운동을 통해 전후복구에 대한 의욕과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위해 1953년 김천문화의집을 창설하게 된다.
강박사는 김천문화의 집 운영위원장으로서 영화상영과 음악감상,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타지역 문화예술단체와의 교류를 펼쳐나갔다.
1954년 경주 서라벌예술제에 보낸 축하전문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서라벌 예술제 축하전문
무심히 차고 밟은 돌 하나이나 그냥 꺾어 버려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는 한그루, 한포기의 초목에 이르기까지 오래 옛 서라벌의 넋이 깃드린 경주의 푸른 하늘 아래 오랜 잠에서 깨우처 일으킨 다사로운 제곡(祭曲)에 정성된 마음과 다함께 누릴 수 있는 깨끗한 예술 혼을 모아 김천 문화의 집 동인 일동은 삼가 따뜻한 마음으로 축하의 말을 드립니다.
1954년 9월 12일
김천문화의 집 대표위원 강중구
김천문화의 집은 1955년 김천문화관으로 개칭하고 강박사는 관장으로서 현 중앙초등학교 교문 입구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문화예술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이 해에 <소문화> 라는 잡지를 발간하게 되는데 창간호 서문을 통해 강박사는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소문화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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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라는 이름은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청춘과 매한가지로 매우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한 것이다. 역사의 위기에 있어서 그것을 파급으로 이끈 것도 문화요, 또한 구원과 재건에 빛나게 한 것도 역시 문화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불안과 초조가 더운 문화를 욕구하고 사회의 안정과 정숙도 또한 문화를 희구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부터 오늘날까지의 문화사를 펼쳐볼 때 그 걸어온 족적에 내재하는 생생한 혈량은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연유는 괄목하고 기억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H.G.웰스가 말하는 완성기에 있는 소위 구라파 문명이 어찌하여 금일의 혼란을 야기했으며 그 이전 찬란하던 동방문명이 어찌하여 몰락했는가?
문화는 사회를 퇴보시키고 퇴보된 사회는 문화를 제도화하고 제도화한 문화는 다시 사회자체의 붕괴에 부식작용을 가해서 신형사회의 구상을 생기게 하여 이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시간적, 공간적인 것을 초월해서 사회의 변천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 사회 변천의 시기마다 현명한 정치가들은 혹은 영웅으로서 혹은 위인으로서 각종의 초사회적인 존재로서 만인의 기억 속에 시공을 넘어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갈수록 더욱 심한 혼란 속에서 근대인 우리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적인 현실에 복잡미묘성을 이루 표현할 수 없고 일찍이 알아보지도 못한 그런 것이다.
근대문명의 창조란 영예의 비참은 분명히 내일의 쾌론을 준비하고 문화는 심산불엽처럼 스스로 고음의 아름다움만 자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문화의 기류는 청양계보다도 정확하게 세계 각지에 전파되고 의(意), 불의(不意)를 불구하고 25억이라고 칭호되는 각 개인에게도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별과 달이 산재하는 우주를 우러러볼 때 우리가 사는 지구가 막연함에 우선 홀로 초연하고 광막한 지구를 생각할 때 그 인위와 자연의 대조에 놀라서 수많은 나라와 산천(山川)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의 약소와 후진에 다시 놀라고 가일층 우리의 향토를 생각할 때 그 황폐와 비문화적인데 대경하지 않을 수 없는 어제 오늘 문화라는 이름의 운동이 얼마나 필요하며 따라서 인추하고 인추할수록 추구의 정숙이 불타오르는 우리들의 내일의 과제인 것이다.
향토애라 함은 향토의 풍토, 문화를 사랑하는 것인바, 황폐의 건설이 문화에의 각성으로서만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데서 『小文化』는 어두운 밤의 등불과 같이 그 거룩한 사명을 지니고 어떠한 모진 계절풍에도 시들지 않을 것이다.
문화라는 이 얼마나 아름다고 부드러운 생활의 대명사인가!
그러나 생활과 같이 차디찬 면도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문화라는 이름은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청춘과 매한가지로 매우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한 것이다.
우리는 문화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열렬한 추구와 동호를 베푸는 것이요, 문화가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고 독선의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련다.
우선 『小文化』의 이름을 최초의 자세를 꾸미고 『新文化』의 이름을 최후의 자세로 갖출 때까지 대중의 미소와 같은 동조의 베푸심이 있기를 미리부터 크게 기대하며 『小文化』의 앞으로의 자율적인 발육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김천문화관 관장 강중구
이어 1956년에는 어린이 문학상을 제정하고 교양강좌와 학생작품전시회, 사진촬영대회, 송년예술의 밤 등 당시로서는 생소한 문화예술행사를 개최해 지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57년 10월 17일부터 31일까지 제 1회 김천문화제를 개최해 진주 개천재, 영월단오제와 함께 김천문화제가 전국 3대 문화제라는 평가를 받으며 김천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강박사는 다음과 같이 김천문화제를 개최하는 취지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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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문화제 개최 취지문 가을은 歸心의 계절이다.
봄에 뿌린 씨앗이 여름의 그 고된 나날을 겪고, 가을이 오면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것도 성숙에의 歸心이요, 사람마다의 가슴에 연륜의 테를 한 둘레 더 감아주어 향수케 하는 것도 목숨에의 歸心이다.
그러기에 10월은 祭天, 예로부터 동방의 민족들은 하늘에 感謝하고 땅에 愛情하였으며, 政事함을 祭 지내듯 엄숙히 하고, 祭 지냄을 政事하듯 거짓이 없게 하였으니, 祭政一致는 奉天하고 順民하는 나라 다스림의 大本이었다.
우리 겨레는 일찍이 이에 본받아 씨 뿌리고, 거둠에 기도하듯 하고, 심고 북돋음을 공경하듯 하여 가난 속에서도 노래를 가꾸고, 고난 가운데서도 뜻을 잃지 아니하였으니, 以來 반만년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온 所爲이다.
이제 이 찬란한 땅 삼천리 강산에 가을이 또 다시 돌아왔다. 비록 국토가 양분되어 悲願의 하늘이 열리지 않았다 하나, 여기는 내 땅 於是乎 노래가 없을손가.
영남의 관문 우리 김천은 북으로 추풍령을 등에 지고, 서에 황악진산을 두었으며 남에는 금오영봉을 바라보며 상단의 땅에 자리잡아 감천, 직지의 兩流를 흘려 멀리 낙동에 보냈으니 정히 삼산이수의 고장, 어찌 복되지 않을손가.
지금은 10월 상달, 하늘에 별이 영글고 땅에는 野菊이 난만하다.
대지에 五穀이 풍요하고, 민심이 흥겨웁다. 문화의 이름으로 올려진 김천문화제가 오늘도 사회의 정화를 도모하고, 인심의 醇化를 다짐하면서, 聖典을 축복하여 8만 시민의 이름으로 환호하며 풍악을 잡히고, 횃불을 든다.
황악산아 드높아라.
금릉벌아 기름져라.
내고향 김천 복되거라. 풍요하라.
1957. 10. 17 강중구
당시 지역 언론사에 기고한 인터뷰에 문화제에 거는 기대감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기도 했다.
“문화원은 문화제를 낳고 문화제는 문화인을 낳고 그리하여 향토의 문화가 발전하고 시민생활이 합리화되고 미화되고 유쾌하고 다 같이 잘살고 정답게 살게 된다면 문화의집, 문화관, 문화원의 사명은 성공리에 끝맺게 되는 것이다.”
김천문화제는 전국 3대 문화제라는 위상에 걸맞게 다양하면서도 범시민적인 규모로 치러졌는데 백일장과 그림, 웅변대회, 자전거하이킹, 민속놀이, 가장행렬이 펼쳐졌으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축하퍼레이드와 야간 폭죽, 공군축하비행 등 파격적인 규모로 전국 언론사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김천문화제
△자전거 하이킹 대회1962년 한국문화원연합회가 결성되면서 김천문화관이 김천문화원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향토문화의 보전과 전승까지 아우르는 전국적인 단체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이때 강박사는 문화원장으로 취임하여 김천문화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쏟는데 그 결실로서 탄생한 것이 전국최초의 문화원사인 ‘김천문화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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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문화센터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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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사는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인 문화예술활동과 여가선용을 위한 전용시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문화센터건립구상에 들어가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각계의 지원과 시민성금을 모으고 부족한 자금은 사재를 충당하여 1965년 11월 25일 현재의 남산동에 김천문화센터를 준공하기에 이른다. 당시 민간이 주동이 되어 건립한 문화센터는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는데 박정희대통령은 “김천문화센터 준공식을 축하하며 향토주민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전당이 되기를 바란다”는 치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1966년 6월 22일 향토문화공로상을 수상하고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대통령을 면담하기도 했으며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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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후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기념촬영(육영수 여사 뒤쪽이 강원장)
김천문화센터는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어 전국 지역과 문화원 관계자들의 견학이 줄을 이었는데 1967년 6월21일 정일권 국무총리가 방문하기도 했다.
△정일권 국무총리 김천문화센터 방문
강박사는 1967년 한국문화원연합회장으로 선출되어 전국 각 지역에 문화원이 설립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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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는 미 국무성 초청으로 세계일주를 하고 1970년 4월 17일 <세계의 표정>이라는 제목으로 책자를 발간했다.
세계 각국의 문화시설을 견학하고 돌아온 강박사는 국제간 문화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0년 7월7일, 일본을 방문하여 이시가와현 나나오시 미소기공민관과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전국최초로 문화단체 간 국제교류의 물꼬를 터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에는 월남을 방문해 국군장병을 위문하고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과 면담하는 등 문화원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자매결연 협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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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함께한 강중구 원장
△베트남 대사와 함께30대 초반부터 김천향토문화발전을 위해서 불꽃같은 삶을 살던 강박사는 1979년 9월28일 60세를 일기로 지병이 악화되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강중구박사 장례식강박사는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남긴 향토문화의 큰 족적은 오래도록 시민들의 가슴속에 큰 울림으로 남았다. 1960년대 초부터 강박사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던 이명우 전 자유총연맹 김천시지부 사무국장은 “어려운 시민들에게 무료로 진찰을 해주던 참의사였으며 손수 빗자루를 들고 문화원 복도며 화장실을 청소할 정도로 소탈했던 진정한 문화인이었다”고 회고했다.
1981년 10월, 시민들은 강박사가 심혈을 기울여 쌓아올린 문화센터 앞에 강중구문화원장 기념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했다.
△강중구 문화원장 기념비 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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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弔詩)
아아, 강중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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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악산 직지사도 흐느끼는데
금오산 감천내도 흐느끼는데
그대 아무말 없이 간단 말인가?
무정하다 인생무상 가이 없구나!
문화의 집 그냥 두고 혼자 가다니,
이럴 수가, 정녕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대답해 봐
안돼, 정말 안돼 이래선 안돼
오대양 육대주 국위선양 빛낸 그대
삼천리 방방곡곡 문화의 메아리 치게 하고
자랑스런 김천의 사나이 강중구여!
왜 말이 없어? 말 좀 해보라구! 응?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
그런데도 세상은 흔히 그렇칠 않더군!
권불삼년에 세불십년이라 했건만
세상은 금력과 권력에 미친놈들 많아요.
그런데도 강중구 그대는 의리의 사나이
명랑하고 쾌활하고 통쾌하고 멋진 사나이
고장을 위해 발벗고 나서 일한 용감한 그대
영남의 영웅 호걸 강중구가
이승을 떠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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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먼 훗날 남북통일 그날이 오면
금강산 만이천봉에 올라 소리쳐 부르리니
그대 저승에서 응답하라 반가이 응답하라
그대 하늘 높이 지어놓은 문화의 집 영원 무궁하리
높푸른 가을 하늘 아래 산명수려한 이곳
철따라 꽃피고 숲이 우거지면 산새들 노래
위대한 사나이 강중구를 찬양하겠지
고장은 그대 애쓴 공로 영원히 빛날진저.
1979년 9월 30일
서울 문화촌 손흥수 삼가 영전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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