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꺾어 세어가며 한없이 먹세 그려”
민경탁 시인·논설위원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꺽어 세어가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에 매어 가나 호화로운 관 앞에 만 사람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어쩌리//”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사진)의 「장진주사」다. 풍류와 애수, 적막과 허무의 정조를 지니고 있다. 인생의 허무와 삶의 유한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현재의 삶을 즐기라는 내용이다. 인생무상을 술로 극복하려는 퇴폐적인 생각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문학 최초의 사설시조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
 |
|
ⓒ 김천신문 |
|
송강은 빼어난 애주가였다. 그는 술 마시기를 즐기는 이유를 첫째, 마음이 불평하여 둘째, 흥취가 나서 셋째, 손님을 접대하느라 넷째, 남이 권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해서라 했다. 근무 중인 대낮에도 술에 취하여 사모가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때도 있었다 한다. 선조 임금이 그에게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 했는데 그는 잔이 작다고 두들겨 사발만큼 크게 늘려 마시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동갑내기 이이(李珥 1536~1584)로부터 “술은 줄이고 말을 삼가라”고 충고를 듣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기복이 심했던 송강은 그의 문학에 비춰진 모습과 좀 다르다. 바른 말을 잘 하며, 임금 앞에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는 정도로 강직했으며 정적(政敵)에겐 매우 가혹했다. 집안이 원래 왕실 인척이었고 경원대군(훗날의 명종)과는 소꿉친구, 율곡과 동갑내기 친구였다. 요즘 말로 금수저 출신이다. 명종 때 그가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자 임금이 잔치에 직접 술과 안주를 보냈다. 임금이, 특명을 내린 사람들이 공부하는 독서당(湖堂)에서 율곡과 함께 공부했다.
정치인 송강에 대한 평은 극도로 상반된다. 남과 타협을 잘 안 하는 강직함으로 명종의 부탁을 거절해 결국 요직에서 배재되는가 하면, 동인 탄압의 주역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귀양, 옥사케 하였다.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해 원망을 자초했다”(선조실록)고 하는가 하면, “충성스럽고 청렴하고 강직하고 절개가 있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근심했다”(선조수정실록)고 기록돼 있다.
송강의 유적은 전남 담양과 경기 고양 그리고 충북 진천에 집중돼 있다. 그는 서울 장의동 (현 청운동)에서 태어나 여섯 차례 벼슬을 받아 관아에 나아가고, 여섯 번 벼슬을 사양해 물러나면서 담양에서는 다섯 번 기거했다. 일찍이 열여섯 살 적에 담양의 성산(星山) 앞을 흐르는 송강(일명 죽록천) 이름을 따 자기 호를 삼고, 이후 그 일대에서 학문과 문학을 하며 식영정, 환벽당, 송강정(원명 죽록정, 사진) 등에 발자취를 남겼다.
경기 고양 신원동에는 송강의 처음 묘와 부모, 형제, 그의 애기(愛妓) 강아(江娥)의 묘(사진)와 작은 송강문학관이 있다. 강아는 송강이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머리를 얹어주며 사랑하던 동기(童妓). 강아는 기생 자미(紫微 본명 진옥)에게 사람들이 송강의 미인이란 의미로 붙여준 이름이다. 송강이 47세 때에 도승지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떠날 때 강아에게 지어준 시가 있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니/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거리의 사람들 모두다 네 모습을 사랑하여 다투리//”
먼 훗날 강아는, 송강이 평북 강계에 귀양 가 있음에 그곳까지 찾아가 시조를 교환하며 사랑을 나누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송강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며 충청·전라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서로가 헤어지게 되자 그녀는 더 이상 송강을 섬길 수 없으매, 머리를 깎고 출가해 ‘소심 (素心)’이란 여승으로 살다가 끝내 고양의 송강 묘 앞에서 생을 마쳤다. 임진왜란 때에 구국의 헌신을 해 보통 ‘의기(義妓) 강아’라 이른다. 시조집 『권화악부』에 그녀의 이름이 ‘송강첩(松江妾)’으로 전한다. 지금 강아, 그녀의 묘는 고양 송강마을에 홀로 있고 송강의 묘는 뒷날 후손이 충북 진천으로 이장했다. 진천에는 송강기념관과 송강사 그리고 그 내외와 아들의 묘가 있다.
|
 |
|
ⓒ 김천신문 |
|
송강은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힌다.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시가문학가로 불린다. 그가 지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우리 고전 시가문학의 최고 명작이라 평가 받는다. 소설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은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이 세 편 뿐이라 했다. 우리나라 고교 국어교과서가 수차례 개편돼 오면서 수많은 글들이 명멸하는데 「관동별곡」은 여지껏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송강은 죽을 때까지 술을 줄이지 못해 관련 일화와 실수를 많이 남겼다. 끝내 질환과 빈한으로 인생을 마감한 그의 묘소를 제자 권필(權韠1569~1612)이 지나다 참배하며 쓴 시가 있다.
“낙엽 진 빈산에 빗소리 쓸쓸한데/풍류 재상 말없이 여기 누우셨구려/슬퍼라, 한 잔 술 권해 올릴 수 없음이여/지난 날 장진주사 이 날을 이름이셨구려//”
인생무상을 술로 극복하려는 습성이 있다면 고쳐야 할 것이다. 나이 들어가며 내 생각만이 옳다는 집착에 빠지기 쉽다. 이것이 나를 곧잘 번민이나 시름에 젖게 한다. 송강의 주벽(酒癖)을 보고 반면교사를 얻어가질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이 세계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지, 후회 없도록 사는 것이 인생의 무상함을 극복하는 길일져. 시인 김수영 박인환 기형도도 과음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